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MhzLtz8dGDg
송진권, 하염없이
간다
소쩍새 울음 그 컴컴한 구렁 속으로
물 가둔 논에 뜬 개구리알 건져 먹고
조팝꽃 더미 속으로
거멓게 웅크린 상여막 어둠 속으로
갈 때까지 간다
꽃 핀 나무 지나 죽은 나무에게로
죽은 나무 지나 조금 더 간다
지옥까지
개를 만나면 개를 타도 간다
깨벌레를 만나면 깨벌레에 업혀 간다
눈깔사탕 같은 달을 물고
열 손가락 기름 먹여 횃불 해 들고
머리카락 뽑아 신을 삼아
십년을 살며 아이 일곱 낳아주고
더 더 간다
털실뭉치 굴리며 간다
요강뚜껑 굴리며 간다
우우 봄밤
우우 하염없는 봄밤
도종환, 발자국
발자국
아, 저 발자국
저렇게 푹푹 파이는 발자국을 남기며
나를 지나간 사람이 있었지
박형준, 공터
고요하고 참 맑다
전봇대에 기대어 말라가는
해바라기 까만 씨앗처럼
흙더미 속에 반쯤 파묻힌 공책의
서툰 글씨들도 정겹다
골목마다 하나씩 있던
교회는 텅 비고
어둠이 어둠처럼
달빛이 달빛처럼 한가로이 다닌다
시멘트 밑에 봉해논
풀벌레 소리가 밤마다 되살아난다
인부들이 사는 가건물의 불빛도
들판의 오두막집처럼 정겹다
오늘도 그 공터를 걸어
집을 향해 가는 내 시간이 아프다
오명선, 오후를 견디는 법
몇 겹으로 접혀
낡은 소파에 누웠다
며칠 현관문이 '외출 중'을 붙잡고 서있는 동안
나는 세상에서 방전되었다
익숙한 풍경이 커튼처럼 걸리고
빛이 차단된 몸에서
수많은 눈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화창한 오후는 그림자를 둘둘 담요처럼 감는다
뱉지 못한 문장 뒤틀린 서술들
나는 오래전 어둠에 길들여진 어긋난 문법
나를 필사하는 오후의 손가락이 한 뼘 길어졌다
흐린 지문으로 나를 한 술 떠먹는다
적막의 두께로
낡은 하루가 완성되었다
가끔 손을 넣어 가라앉은 나를 휘저어 본다
곽대근, 그리워서 가는 길
그리워서 가는 길은 발걸음이 무겁지 않다
흙 묻은 삽을 옆에 놓고
술판을 벌리며
찔레꽃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
하나 둘 꽃이 필 때 떠나고
녹슨 문고리가 바람에 덜거덩 거린다
그리워서 가는 길은
문고리를 잡으러 가는 길이다
삶의 지문처럼 지워져 가는 흔적
잡으러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