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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ppS8ZfLxeD0
전건호, 영혼의 집
담쟁이와 눈이 마주쳤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이닥칠 기세다
금이 간 벽 통째로 감아 돌며 올라와
창문 들여다보며 손짓을 한다
나를 만나기 위해
콘크리트 틈 뿌리 내리고
백 년을 기어올랐구나
아, 내가 이 집에 눕기 전부터
네 영혼의 집이었구나
내가 누워 잠든 사이
백년을 기어올라
걸어 잠근 방안을
애타게 들여다 보았구나
바람에 찢긴 파란 손바닥
가늘게 흔들며
도종환, 가을 오후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며
서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낯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
내 품에 머리를 기대오는 가을의 어깨 위에
나는 들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늦은 가을 오후
이창수, 추강에 낚시 드리우니
식당 벽에 걸린 달력 속에 낚시를 하는 노인이 있다
도롱이를 걸친 흰 수염 옆모습이 낯이 익다
숙취를 콩나물 해장국으로 달래며
식당 주인에게 고춧가루를 더 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낚시하던 노인이 나를 보고 있다
저곳은 어디일까
노인이 다시 낚싯대로 눈을 고정시킨다
낙엽이 쌓인 강바닥에 잉어가 지나간다
사람들이 고개 숙여 밥 먹는다
물고기보다 조용히 국물을 마신다
노인이 천천히 밑밥을 갈고 있다
멀리 물레방아가 보이고
허술한 나무다리를 건너오는
지게 진 사내와 그의 아들
두 자나 되는 잉어를 놓친 기억은 사물사물해지고
웅크린 채 밥 먹는 나를
저 노인은 왜 바라보는 것일까
임동윤, 그늘
튜울립나무 그늘만 깊어가는 자전거보관소
손발 묶인 시간이 정박해 있다
아득히 지워진 이름표와 녹이 슨 뼈마디
무단폐기물 꼬리표를 달고
푸른 추억을 돌리고 있다
4차선도로를 질주하던 속도는
녹슨 바퀴살에 끼어 있다
지하사우나 환풍기구멍으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에 몸을 맡기고
종일 뒤틀린 안장과 바퀴살이 찜질을 한다
퉁퉁 분 바퀴, 그 무게에 자지러지는 쇠별꽃들
떠나려 해도 꽁꽁 묶여 있는 몸
녹슨 것들은 다, 무섭다
이정원, 흙의 사랑법
독을 묻었네
마당을 파고 김칫독을 묻었네
흙에서 난 배추를
흙으로 만든 독에 담아
다시 흙에 묻었네
흙은 독을 발효시키고
독은 배추를 발효시키고
배추는 나를 발효시킬 것이네
맛이 깊어질수록
독은 점점 제 속을 비워
나를 끌어당길 것이네
겨울이 깊어질수록
나는 독안으로
한없이 꺼져 들어갈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