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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불멸의 명작
누가
바다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바닥부터 말하겠네
바닥 치고 올라간 물길 수직으로 치솟을 때
모래밭에 모로 누워
하늘에 밑줄 친 수평선을 보겠네
수평선을 보다
재미도 의미도 없이 산 사람 하나
소리쳐 부르겠네
부르다 지치면 나는
물결처럼 기우뚱하겠네
누가 또
바다에 대해 다시 말하려면
나는 대책없이
파도는 내 전율이라고 쓰고 말겠네
누구도 받아쓸 수 없는 대하소설 같은 것
정말로 나는
저 활짝 펼친 눈부신 책에
견줄 만한 걸작을 본 적 없노라고 쓰고야 말겠네
왔다갔다 하는 게 인생이라고
물살은 거품 물고 철썩이겠지만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건 바다뿐이라고
해안선은 슬며시 일러주겠지만
마침내 나는
밀려오는 감동에 빠지고 말겠네
전동균, 절
절을 올린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기 위해
흰 벽을 마주 보고
땀 젖은 몸을 굽혔다 세우다 하다 보면
나는 나에게 절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를 믿지 못하고
이 세상을 믿지 못하고
내 영과 혼은 자꾸 나를 떠나려고 하니
내 속의 어떤 절을 향해 무릎 꿇고
공양을 올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서럽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두렵고
이미 죽은 자의 영혼이 그립고 그리워서
무릎이 굽혀지지 않는데
찬 마룻바닥에 댄 이마가
잘 떼어지지 않는데
누구일까, 어느새 내 곁에서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보다 더 공손하게 절을 올리는
저 사람은
천상병, 약속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얼 기다리고 있다
문인수, 드라이플라워
마음 옮긴 애인은 빛깔만 남는다
말린 장미. 안개꽃 한 바구니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다. 오래
기별 없다. 너는 이제 내게 젖지 않아서
손 뻗어 건드리면 바스러지는 허물, 먼지 같은 시간들
가고 없는 향기가 자욱하게 눈앞을 가릴 때
찔린다. 이 뾰족한 가시는
딱딱하게 굳은 독한 상처이거나 먼 길 소실점
그 끝이어서 문득, 문득 찔린다
이것이 너 떠난 발자국 소리이다
김상미, 녹(綠)의 미학
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 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수가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