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q5TaWjysDWU
송진권, 그 저녁에 대하여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 우리 마당에 그득히 마실 오던 별과 달에 대하여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 양푼을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들이며
일가들을 따라온 놓아먹이는 개들과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들에 대하여
김치 얹어 감자를 먹으며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목소리 우렁우렁하던 수양고모에 대하여
그 고모를 따라온 꼬리 끝에 흰 점이 배긴 개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겨운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 감은 소와
구유 속이며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별과 달
슬레이트 지붕 너머
묵은 가죽나무가 흩뿌리던 그 저녁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저녁의
퍼붓는 졸음 속으로 내리던
감자분 같은 보얀 달빛에 대하여
이창수, 신발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
아무리 값비싼 옷을 잃어버려도
맨발로 돌아오는 사람보다 불쌍하지는 않다
반포대교 아래에서
날 저물도록 신발 찾는 사내를 보았다
오래전 잃어버린 신발 때문에
귀가를 미루는 가장을 만났다
여태 가라앉지 않고 떠다니는
물거품 같은 신발 한 짝을 찾아다니는 초로의 사내
맨발로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남은 신발을 벗어버리지도 못하고
물거품으로 떠돌고 있는 것이리라
너덜너덜한 어둠으로 흘러들어가는 저 사람이
오래전 잃어버린 내 신발 같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이규리, 그게 외로움인 줄 모르고
시멘트와 물을 비벼 넣으니 단박에 벽이 생기고
벽을 사이로 순식간에
안과 밖이 나왔다
단단하구나 너에게
그게 외로움인 줄 모르고 비벼 넣었으니
어쩌자고 저물녘을 비벼 넣어 백년을 꿈꾸었을까
벽이 없었다면 어떻게 너에게 기댈 수 있었겠니
기대어 꿈꿀 수 있었겠니
벽이 없었다면 날 어디다 감추었겠니
치사한 의문들 어떻게 적었겠니
받아주었으니, 기대었으니
그거 내 안으로 들어온 밖 아니겠니
밖이 되어 준 너 아니겠니
이하석, 하늘
은행나무의 하늘이 노랗게 내려앉는다
겨울비 오기 전 잠깐 밟아보는 푹신한 하늘
나무 위엔 봄 여름 가을 내내 가지들이 찔러댔던 하늘이
상처도 없이 파랗다
가지들이 제 욕망의 잎들을 떨군 다음
겨울 오기 전 서둘러 제 꿈을 바람의 실로 꿰맸기 때문이다
배한봉, 풀씨의 힘
풀씨가 튄다
햇볕 뜨거울수록 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사방팔방 신나게 튄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터져
줄기차게 종족을 퍼트리는
저 힘
잡풀이라고
함부로 짓밟고 무시하지 마
풀이 없다면
대지는 얼마나 삭막할 것이며
벌레며 짐승들은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풀씨가 튄다
여치와 메뚜기도 함께 튄다
우리는 경계를 만들어 삶의 뿌리박으려 하지만
그 경계를 뛰어넘는
풀씨의
은빛 종소리
술래잡기하는 아이들 합창처럼 울려 퍼진
하늘이 새파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