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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환, 여백
감나무 가지 끝에 빨간 홍시 몇 알
푸른 하늘에서 마른번개를 맞고 있다
새들이 다닌 길은 금세 지워지고
눈부신 적멸만이 바다보다 깊다
저런 기다림은 옥양목 빛이다
이 차갑고 명징한 여백 앞에서는
천사들도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다
이규리, 허공이 아팠을까
바람 부는 날, 종일 밖을 보면
바람의 뼈가 보인다
사람인 듯 바람에 뼈가 보인다
허공을 울리는 운판 소리
오래 전 어제와 글피가 돌아와 흔들리며
쓰는 말
바람이 손바닥을 가졌다면 허공은 늘 아팠을까
그 바람, 밖에서 부는데 왜 늘 안이 흔들리는지
종일 바람을 내다보면, 나를 보면
없는 말이 들린다
그 소리, 손바닥 아프도록 오래 부르는 소리
밖으로 나와, 어서 나와
안이 더 위험한 곳이야
혼자 오래 있다보면, 울다보면
그건 제 안에 부는 바람, 제가 바람이었던 모든 부딪힘
더구나 어쩌자고 나무가 바람을 밀었나
제 속에 우수수 쓰러지는 풍경들
저 바람이 바람을 다 살고 말겠다
천수호, 바람의 뼈
시속 백 킬로미터의 자동차
창밖으로 손 내밀면
병아리 한 마리를 물커덩 움켜쥐었을 때 그 느낌
바람의 살점이 오동통 손바닥 안에 만져진다
오물락 조물락 만지작거리면
바람의 뼈가 오드득 빠드득
흰 눈 뭉치는 소리를 낸다
저렇듯 살을 붙여가며
풀이며 꽃이며 나무를 만들어갈 때
아득바득 눈 뭉치는 소리가 사방천지 숲을 이룬다
바람의 뼈가 걸어 나간 나뭇가지 위에
얼키설키 지은 까치집 하나
뼛속에 살을 키우는 저 집 안에서 들려오는
눈보다 더 단단히 뭉쳐지는 그 무엇의 소리
이성부, 바다
바다는 자랑하지 않는다
이미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넘치는 힘 몇 번이나 참고
몇 번이나 숨긴다
쓰러지면 오히려 싱싱한 마음
맨 처음으로 태어난 마음
붉은 울음 뒤에 두고 달려오며
바다는 먼저 말하지 않는다
먼저 사랑하지 않는다
바다는 죽는다
무덤으로 가는 것이 더 아름다워
바다는 그 가슴에
서슬 푸른 칼을 꽂는다
박승민, 지붕의 등뼈
노인성 척추 측만증을 앓는
지붕의 등뼈는 난감하다
너무 오래 비를 맞아
가벼운 새의 발놀림에도
얇은 비스킷처럼 부서진다
어떤 기와는 살갗이 벗겨져
갈비뼈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수많은 모래와 모래가 만나
돌이끼 같은 한 세월 이루었으나
밤새도록 내리는 장대비를 맞고 있는
한사코 제 등으로 비를 막는
어머니의 등뼈
낡은 빨랫줄처럼 위태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