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bzGzVSzSw5w
이경림, 영롱한 아침
아아 동틀 녘에는
칠흑의 몸에 이파리 돋는다
나는 순식간에 자란 억센 이파리
들을 온 몸에 꽂고
두통 위에
마알갛게 도장을 찍는다
목영해, 밥통
그래 밥통이다
남의 배 불려주느라
자기 배는 비우는 밥통이다
이득도 없는 일에 말려들어
배터지게 욕만 먹는 밥통이다
그래도 밥통이 없으면
우리는 생쌀을 씹으며 집을 나서야 하는데
똑똑한 사람들만 설쳐대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고맙게도
뱃살 넉넉한 그 모습 그대로
모락모락 김이 나는 그 마음 그대로
싱크대 위에 터 잡은 밥통
밥을 푸러 손잡이를 쥐면
내 손목 잡은 듯한 기분
뚜껑을 열면
내 몸내음 맡는 듯한 기분
그래 밥통이다
등신도, 바보 천치도 아닌
배부르게 들어도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
밥통이다
언제나 속이 따뜻한 보온밥통이다
최승호, 별것도 아닌 것이
별것도 아닌 것이 나를 움직인다
나는 별게 아니겠지
하면서 별것 아닌 것으로 제쳐버리면
어느새 큰일이 되고 마는
쓸데없는 일인 것 같고 별것 아닌
정말 별것도 아닌 것이 나를 움직인다
아직껏 나는
바보스럽도록 순진하고
멍게처럼 멍청한 것도 아닐 텐데
나는 죄가 되는 게 아니겠지
하면서 죄 없는 일이라 제쳐버리면
터무니없이 큰 죄가 되고 마는
정말 별것도 아닌 것이 나를 움직인다
나는 곧장 무덤으로
시시각각 무덤 쪽으로 전진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별게 아니겠지 하면 큰 일이 나고
죄가 아니겠지 하면 큰 죄가 되고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정말 별것도 아닌 것들은 언제쯤에나
속 시원히 나를 풀어줄 속셈인가
최승자, 번역해다오
침묵은 공기이고
언어는 벽돌이다
바람은 벽돌담 사이를
통과할 수 있다
나는 네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다
지금 내 손은 벽돌이지만
네 발은 공기이다
통과하라, 나를
그러나 그 전에 번역해다오 나를
내 침묵을 언어로
내 언어를 침묵으로
그것이 네가 내 인생을 거쳐가면서
풀어야 할 통행료이다
신달자, 주름
저 깊은 계곡
절간 하나 지었으면 좋겠다
투덜대지 않고 조신하게
네 생의 발자국이 파고 간
파도
이제 잠잠한 굴곡의 깊이에서
인자하여라
편안한 침묵의 골에 누워도 좋겠다
모든 걸 내어 준 자리에 깊게 파이는
물살
바람에도 떠내려가지 않았다
일생
농사지은 생의 볏단을
여기 쟁여 놓은 것 같은
저 얼굴에 접힌 주름
희열과 안락의 깊이라도 되는 듯
부신
시간 위에 얼비치는 무늬
가까이 봐도 허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