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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경, 무지 심심한 날
비 오는 날이고요
똑딱 벌레 한 마리가
방바닥을 기어가지요
뒤집어 놓으면
똑하고 튕겨 오르고
딱하고 떨어지지요
재미나서 자꾸 하지만
똑딱이는 환장하지요
무지 심심한 날
이 비
그칠 비는 아니고요
최영철, 흐르는 물
한여름 개울이 내는 시원한 물 소리
모난 돌 스치고 가느라 긁힌
물의 상처들이 내는 아우성이었네
아프다 아프다 내지르고 가는 물 소리
내 미지근한 속이 다 서늘해졌네
한차례 비 뿌린 뒤
더 맑고 시원해진 노래
그 가슴팍에 발 담궜네
확성기 달고 골목 누비는
행상 아주머니 외침
칼잠 깨 듣고 있자니
굽이굽이 막다른 골목
세파의 굴곡을 타고 흐르다 여기까지 와서
순하고 구성진 한 자락 노래가 되었네
너무 평탄해서 흐를 수 없는
나 썩은 물
당기고 밀어주는
울퉁불퉁한 굴곡을 만나러 가네
배한봉, 푸른 힘이 은유의 길을 만든다
바람 불고 잎들이
뒤척거린다
그 아래 잎들의 신음이 쌓여
그림자가 얼룩지고 있다
산책 나온 아침, 눈이 동그래진다
나뭇잎에 허공 길이 뚫리고
거기 헛발 디딘 햇빛
금싸라기를 쏟아 세상이 다 환해진다
아 나뭇잎 허공
벌레먹은 이 자리가
우화(羽化)를 기다리는 은유의 길이라니
허공에 빠진 내 생각 뜯어먹으며
또 살찐 벌레 한 마리 지나간다
권정일, 검정 구두
이제 너에 대한 예의를 지킬 때가 되었다
너는 나를 끌고
내 행선지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
수상한 데를 둘러볼 때나
깡통을 걷어찰 때나
음악을 맞춰 까닥까닥 흥겨울 때도
노련하게 내 표정에 밑줄을 그어주었다
까치발을 세우고 남자를 훔쳐 볼 때도
가지런히 뒤꿈치 모으고 내숭을 떨 때도
반짝반짝 나를 빛나게 해 주었다
철없는 발자국에도 눈이 있다고
너는 나보다 먼저 젖었고 먼저 똥을 밟았고
먼저 달려가 악수를 했고 먼저 집에 데려다 주었다
너는 나보다 나중에 밥을 먹었고 나중에 잠을 잤고
뜬 눈으로 밤을 새기도 했다
너는 표정 없는 나를 터벅터벅 읽어내기로 했고
그래, 살다보면 높은 벽도, 깊은 수렁도 만나는 거야
그렇다고 기죽지 말라고
내 과거를 편집해 아침마다 페이지를 넘겨주었다
나를 깁듯 너를 기워 노쇠한 너를 따라 다녔다
이제 나는 너에게 예의를 갖추려고 한다
무거웠던 나의 아픔을 털어내고
나를 내려놓으라고 이른 아침
평생 한 번 빛(光)나는 화장을 해 주었다
수거함 앞에 정중히 내다 놓았다
천상병, 갈대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