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천, 투명
혀로 빛나게 핥아놓은 밥그릇에는
허기가 가득 차 있다
허기는 투명하지만 잘 보인다
뼈가 앙상한 것을 보면
이빨은 이제
밥그릇도 씹어먹을 수 있으리라
나는 개들이
씹던 목줄을 뱉어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내 손가락을 철망 안으로 넣어주었을 때
녀석은 절대로 물지 않았다
내가 밥을 준다는 투명한 의식이
녀석을 밥그릇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두 끼나 세 끼를 주고 싶지만
나는 사장의 명령에 따라 한 끼만 주고 있다
나는 회사의 수위
개는 밤에 내가 할 일을 대신한다
사원들이 퇴근할 때, 개집 문을 열어놓아
불투명한 밤을 투명하게 밝혀놓아야
안심하고 잠잘 수가 있다
간밤에 없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일감들 사이에서 녀석이 잡아놓고
다 먹지 않은 의문 하나가 피를 흘리고 있다
내가 받은 임금은 아주 적다
게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
그러니까, 개밥 정도인 것이다
개의 그 깊은 낮잠 속에 고여 비치는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권석창, 하루살이
거미줄에 작은 다리를 걸치고
죽은 하루살이야
창틀에 고요히 누워 있는
하루살이야
네 죽음엔 슬픔이 없다
네 죽음엔 피 냄새도 없다
짧은 일생을 조상(弔喪)해 줄
시든 꽃 한 송이 없어도
한 접시 곤충의 눈물이 없어도
슬픔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네 일생은 슬픔이 배어들 틈도 없이
음모가 끼어들 틈도 없이
혹은 죽음의 예감도 없이
꽉 찬 나래로 끝없이 찬란한
비상(飛翔)을 하다가
생명이 다하는 순간
꽃잎이 지듯
눈이 내리듯
그렇게 수직으로 떨어졌구나
김필녀, 어미
미역국 달게 먹던 딸아이
애기 우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숟가락을 들고 뛰어간다
"많이 울어야 목구멍 터진다
마저 먹어라"
등 돌리고 앉아
어설프게 젖을 물린다
너 낳고 나도 그랬다
식은 국솥에
불을 댕긴다
박후자, 그네
눈은 멀리 보고
발은 힘차게 내밀어라
어릴 적
그네타기 무서워 움츠리는 나에게
어머니가 하신 말씀
오늘
느려지는 생(生)의 그네줄을 잡고
아직도 앞만 보이는 눈과
떨리는 다리로 발을 구르네요
어머니
어쩌면 좋을까요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저 푸른 하늘을
배한봉, 어떤 등불이
쇠물닭 가족 헤엄치고 있다
짙푸른 자라풀 위에
햇발 불러 앉힌 한 폭 평화
갈숲 지나던 내 인기척에 놀랐는지
목을 뽑아 두리번거린다
적의는 없었으나
나 함부로 기웃거린 것이
그들에겐 도발로 보였다는 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서 있는데
붉은 신호등 줄지어 나를 본다
저 신호등은 쇠물닭의 붉은 이마
여름 늪을 푸른 신호등이라 여기고
함부로 들어선 나를
서늘하게 일깨우는 자연의 말씀이다
말하자면, 예의가 필요하다는 것
상대가
미물이든, 천지 사방이든
혹은 우주든
우리는 때때로
조심스러워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