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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 헌화가
당신에게 바칠 꽃이 다 떨어지면
여기 와 일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새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소리 듣다
아침이 오면 절벽 아래로 꽃처럼 피어날지도
당신에게 바칠 꽃이 다 떨어지면
깨끗이 저를 잊어주시길 바랍니다
내 마음 알 때쯤이면 당신도 정처 없이 이곳으로 흘러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황인숙, 장마
빗방울보다 단단한 것들이
빗방울을 가볍게
맞받아치는 소리 들린다
또 하염없이 맞받아치는
냉장고 위 천장 구석
둘둘 말린 거미줄, 이라기보다 거미줄의 허물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들이칠 대마다
풀썩, 풀썩, 몸을 뒤챈다
이 방에서 거미를 본 바 없는데
저렇듯 거미의 자취가 종종 보인다
비 오는 날은 거미들이
공치는 날일 것이다
파리, 나방이, 잠자리, 하루살이
그 많은 날벌레도 그럴 것이듯
하필이면 급경사길이 많은 동네에서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를 종종 본다
비 오는 날 그분을 만나면
세상이 폐지처럼
거미줄처럼 눅눅해진다
할머니시여, 빗방울보다 단단하소서
김승기, 동행
나목(裸木)이
무너지듯 기댄다
옆에 있던 헐벗음이
그 무게를 온전히 받는다
자신도 고개 떨구고
못내 같이 기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의 상처를 핥고
그렇게 겨우
새살 돋은 아침
자신의 무게를 빼내어 절룩절룩
다시 세우는 길
그래그래, 뒤돌아보지 않기
자꾸 돌아보며 울지 않기
최승헌, 숯
자신을 온전히 태울 수 있다는 건
세상을 대충 살겠다는 마음이 아니다
한세상에서 한세상으로 건너가는 일이
밤새 꽃이 피고 지는 일이 아니기에
사랑은 그 절정에서 적멸에 이르렀고
슬픔은 관절마디마다 몸을 풀었다
갈라진 뼈마디 속에서
다시 숨결을 고를 때까지
아무 것도 성한 것이 없다면
소리조차 이를 악다물었을 거다
상처가 깊으면 속이 보인다지만
오장육부까지 시커먼 속이
어디 그리 만만하게 열리든가
캄캄한 어둠속에서 만날 수 있는 건
자신의 그림자밖에 없다는 것을
활활 타오르는 불속 깊숙이
제 몸을 던져 본 자는 알 것이다
온몸으로 교신하는 생이 어둠을 따라
마지막 입관자리를 찾아 갔을 뿐
처음부터 아무도 불을 켜지 않았다는 것을
한정원, 동사(動詞)를 불러오다
전시실을 돌고 돌아
루브르 박물관 휴게실에서 동사(動詞)를 끌어올린다
결국 역사는 Be 동사와 Have 동사의 교직으로
촘촘해진 시간이라는 것을
그는 그곳에 있었고 그녀는 그를 가졌었고
왕은 신하를 거느렸고 죽음은 거기에 퍼져 있었다
존재 없이는 소유도 없었다는 중세의 증거
현재 진행형을 위해 존재 동사는 맨 앞에 서 있다
고딕체의 루이 14세는 거기에 있고
나는 갈색 루이까또즈 가방을 가지고 있다
대장장이 헤르메스는 마차를 타고 몽마르트 언덕에 있고
나는 헤르메스 지갑을 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생은 이렇게 공터에서 시작해
과거의 시간까지 끌어안고 무겁게 달음박질친다
Be 동사만으로도 수련이 피어오르던 날
소유하지 않고 나는 그저 누구였던 날들
그는 그냥 그답게 천천히 다가오던 날들
전시실의 그림을 가득 실은 카메라는
동양 여자의 목에 걸려 본국으로 돌아간다
이제 나는 몸에 지니고 있던 모든 것 내려놓고
누구와 함께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
그냥 Be 동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