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을 때 생각나는 색은 회색빛이다. 회색이 주는 이미지 그대로 참 칙칙하고 음울했다.
초등학교에서 나는 괴롭힘을 당하진 않았지만 친구가 많은 아이도 아니었다. 난 그냥 무기력했고, 말수가 극히 적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내가 풍기는 분위기를 보는 것 만으로도 알아챈 것 같다. 동정이었을까 무관심이었을까... 이젠 어떻든 상관없어졌지만.
겨울에는 학교에서 살고 싶었다. 우리집은 들어가기가 싫을 정도로 너무 추웠다. 하지만 엄마가 일하러 나간 뒤 어두컴컴한 냉골인 방에
하루종일 혼자 누워있을 동생을 생각하면 나는 너무나 미안해져 새어나오는 눈물을 누가 볼새라 훔치며 험한 길을 꾸역꾸역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마른 나를 보며 이렇게 말라서 속상해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나는 엄마는 와 안먹는데 살이 많노? 라고 물었다.
그러면 엄마는 ‘목이 아파서 그러지’ 라고 대답하거나 아무말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때면 나는 초점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동생을 보며
속으로 질문을 삼켰다. ‘엄마는 두경이가 더 말랐는데 안 속상하나’.
엄마는 고물상에 가서 주운 고물들과 폐지를 팔았다. 그 전에는 건너 마을 신발 공장에 다녔지만 공장이 망한 후로는 같이 다니던 아줌마들과 고물을
주우러 다녔다. 벌이는 공장에 다녔을 때가 당연히 더 좋았지만 엄마가 집에 있는 시간은 공장이 망한 후가 더 많아서 철이 없던 나는 걱정을 하면서도
내심 좋아했었다. "사람은 고쳐쓰는게 아닌기라" 그 즈음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한 것이었다. 제법 쓸만한 고물을 찾으면 엄마는 집에 가져와 고쳐쓰거나
먹을것과 바꿨다. ‘사람이 물건인가, 어떻게 고쳐써예’ 나는 엄마가 주워온 고물들을 닦으며 작게 중얼거리곤했다.
엄마는 내가 어떻게 대답하든지 늘 이렇게 답했다.
“우리 아부지도 그렇고 니네 아부지도 그렇고 술만 마시면 그렇게 된다아이가. 엄마가 노상 그렇게 말한걸 내가 안 들었지,
술 마시고 그러는 인간은 인간 자체가 그렇타꼬... 안변한다...니 아부지같은 사람만나면 뒤도 보지말고 후딱 도망가라고...” 그리곤 이내 입을 다무셨다.
그 사람이 한바탕 하고 나간 집에는 늘 반짝거리는 유리조각들만이 여기저기 흩뿌려져있었다.
집에 있는거라곤 줍거나 누군가에게 얻어온 낡고 헤진 이불뿐이라 깨 부술게 그 사람이 마시다 남긴 술병이 전부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그 사람이 발광을 할때면 난 두경이를 지켰다. 두경이의 목까지 덮혀있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놓고 방 구석으로 밀었다.
그리고 두경이 쪽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에게 맞는 엄마를 등지고 앉았다. 그게 엄마와 약속한 두경이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 사람의 욕설과 몸싸움 소리를 애써 안들리는체 하며 나는 절대 못잊을 기억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엄마를 왜 때려, 이 나쁜 새끼야!” 라며 울면서 달려가 그 사람의 다리를 때리고 물어 뜯었다.
나는 내 자신을 주인을 지키는 개라고 생각하며 등과 머리를 맞아도 계속 매달려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때리는 것을 말리는 엄마를 밀었다.
악소리와 함께 엄마는 구석에 누워있는 두경이 위에 쓰러졌다. 두경이가 앓는 소리를 내고 엄마는 "두경아!”라고 소리지르며 울었다.
그 순간 그 사람은 비겁하게 도망가듯 집을 나갔다. 엄마는 상황이 진정된 뒤 나를 혼냈다. 그리고 나를 안으며 미안하다고 서럽게 울었다.
나도 서럽게 울었다. 울면서 엄마는 “엄마가 지켜줄게 엄마가...엄마가... 니는 어찌됬든 두경이만 살피라” 라고 했다.
그 후로 나는 이런 일이 있을때 마다 엄마에게 등을 돌리고 줄 곧 두경이만 지켰다.
학교에 빠진 날을 속으로 세어보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아무도 신경안쓰는데 뭐.
두경이는 여전히 조용하고 나는 얼룩진 벽만 바라보고있다. 엉덩이는 무뎌져 더는 저리지 않고 꼬리뼈는 아직도 시큰하다.
엄마는 언제쯤 괜찮다고 안아줄까. 너무 추워서 떨리는 손이 멈추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