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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OsviNlZ7j0Q
신달자, 종소리
종이 안에서 종이 울리는 것을 듣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종이 앞에서
뜨거운 과욕의 갈망을 걷어내는 순간
울리는 종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리고
넝마같이 귓전에 펄럭이는 소음을 지나
해거름에 더욱 눈 찔리는 불빛들 헐떡이는
울화처럼 치솟은 빌딩 숲을 걸어와
간절히 마주하는 종이 앞에서
맑은 랩으로 싸 얼려 놓은 순수라는 말
두 손을 비벼 더운 사람의 기운으로
풀어 녹이는 순간
저 지하 층층 어둠 속에서 푸르게 다가와
내 가슴에 울리는 종
종 울린다
장석남, 가여운 설레임
내가 가진 돌멩이 하나는 까만 것
돌가웃 된 아기의 주먹만한 것
말은 더듬고 나이는 사마천보다도 많다
내 곁에 있은 지 오래여서 둥근 모서리에
눈(目)이 생겼다
나지막한 노래가 지나가면 어룽댄다
그 속에 연못이 하나 잔잔하다
뜰에는 바람들 가지런히 모여서 자고
벚꽃 길이 언덕을 넘어갔다
하얀 꽃융단이 되어 내려온다
어떤 설레임으로 깨워야 다 일어나 내게 오나
내게 가르쳐준 이 없고 나는 다만
여러 가지 설레임을 바꾸어가며 가슴에 앉혀보는 것이다
오, 가여운 설레임들
허만하, 흰 종이 전율
모든 빛을 거절하고
자기 내부에 어둠을 기르는 흰 종이
시를 쓰는 일은
겨울하늘 별빛처럼 가늘게 떠는 언어를
손으로 움켜잡은
펜 촉으로 흰 종이에 기억시키는 일이다
멀어져 가는 썰매 소리 얼어붙는
눈부신 설원은 흰 종이처럼 끝이 없다
눈송이는 캄캄한 하늘의 높이에서
싸늘한 가슴 덮어주며 몸을 던진다
사라지기 위하여 땅을 찾는 은백색 반짝임
눈송이가 사라지는 순간
시는 영원의 거울을 본다
가루눈에 잠기는 지평선이 얼어붙는
흰 종이의 절벽은 무섭다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의 모습을
흰 종이에 조각하기 위하여
시는 잎 진 한 그루 나무의 추위처럼
바람 부는 설원 가장자리에 선다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을 보기 위하여
시는 사람 발자국을 모르는 흰 설원에
폭설처럼 걸어 들어간다
자신의 발자국을 기억시킨다
발자국의 깊이는 시의 깊이다
적설의 두께는 언어의 순도다
시를 쓰는 일은
설원의 눈부심 앞에서 가늘게 떠는 침묵의 전율을
흰 종이에 기억시키는 일이다
역사 속에서 정신의 아름다움을 견디는 일이다
정태일, 석등
축서사 마당가, 불 꺼진 석등
산새 한 마리 바람 끌고 들어간다
나도 저 새 따라 들고 싶다
새가 될 수 없는 나
풍진 같은 거 훌훌 털 수 있다면
구름 딛고 저 설봉 날아갈 것을
아무도 모르는 돌 위 앉은 당신
눈을 쓸면서 내 이름 적고
나는 잔디 깊은 계곡 너머
우담화 꺾어 당신 머리에 꽂아
진홍빛 목도리에 당신을 새겨
내 목덜미 포근히 감아
혼곤하게 잠들고 싶다
불 꺼진 축서사
홀로 서서
이 세상 참 아름답다고
천양희, 나의 산수
절에 가면 절하게 되고
바다에 가면 바라보게 된다
절하라고 절이 있고
바라보라고 바다가 있나
절할 때 내 몸은 바닥이 되고
바라볼 때 내 눈은 창문처럼 열린다
나는 창문 밖을 보는데
누군가는 세상을 보고 있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바닥 모를 바다를 생각한다
나는 몇 번이나 땅을 짚고 일어나고
몇 번이나 파도 한자락 밀고 당기는데
왜 세상은
푸시맨만 있고 풀맨은 없나
바다에는 그늘이 없고
길에서 절은 절대로 보이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