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태, 호미질
어린 날, 어머니와 고구마나 감자를 거두는 날이면
내가 캐는 것들은 하나같이 생살이 찍히거나
몸통이 잘려 허연 피를 쏟아냈는데
희한하게도 어머니의 호미 끝에
이끌려 나온 고구마와 감자들은
껍질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
가만 보니 어머니는 호미 날을 수직으로
세우는 법 없이 멀찌감치 팔을 뻗어
마치 밭두둑을 싸안듯이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그 때, 그 어머니의 나이를
훌쩍 넘긴 이 나이에도
내 호미질은 서툴기만 한데
이런 내가 애 둘을 낳아 키우고
뻔뻔한 선생질을 하고 있다니
누군가의 호미질에 정수리를 내리 찍힐 일 아닌가
한옥순, 구불길
군산 어딘가에 가면 구불길이라는 길이 있다는데
구불길이란 게 꼭 군산에 난 길만 구불길인지
내 속내에 들어 있는 고불고불한 내장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구불구불, 구불길이 아닌지
세상에 억세고 질긴 것들과 딱딱한 것들
아무리 뜨겁고 진저리치게 차가운 것들이라도
작은 동굴 같은 내 입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이내
순하고 축축해져 내장 구불길을 쉬이 내려가지
내가 먹은 나이도 내가 마신 세월도
내가 삼킨 울음도 내가 들이킨 설움도
구불거리는 신작로 같은 내장 길로 떠나보내지
구불구불한 강물 같은 내장 길로 흘려보내지
내려가다 생각해보면 때론 기가 턱하고 막혀버려
구불길 급히 굽어진 데서 잠시 멈춰버리기도 하지
그럴 때 옹이진 가슴팍을 쓱쓱 쓸어내리면
바람이 밀 듯 다시 제 길 찾아 내려가기도 하지
구불길 구불길 하고 자꾸 되뇌이다 보면
어느새 세월도 구불텅구불텅 저만치로 흐르고 있지
이원식, 정중한 부탁
섭리를 잊은 잎새
미련을 놓지 않네
고개 내민 봄날에
머물 수만은 없겠지
새 인연 돋아날 자리
아름답게 비워주길
최준, 저쪽
별들이 시계를 보고 있다
밤의 옷장에서 꺼낸 노랗고 파란
혹은 붉은 빛 도는 외투를 입고
언제까지 빛의 이름으로 빛나야 하는 거지
몸으로 보여주는 마음의 형상들
그걸 언어로 꾸며내는 몸짓들
고민해 봐 알고 보면
저들도 수많은 별들의 하나
어떤 별은 아침
어떤 별은 저녁
어떤 별은 어른처럼 칭얼거리고
어떤 별은 아이처럼 침묵하고
어떤 별은 수도사가 되어
사라진다 우주 너머로
뒤편을 끝내 보여주지 않는 건
어제도 뒤편이 없었기 때문
비가 내린다 육지와
바다가 사라졌다 문득
지중해가 궁금하다
박노정, 타작
탁, 타탁
투닥투닥
타작 소리에 화들짝 놀래다
단풍은 골마다 넘치고
놀이는 질펀한데
내 인생의 타작 마당엔
추수가 없다
쿵
가슴 한 켠 까무러친다
타작, 최후의 심판
누가 나를 흠씬 두들겨 패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