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찬, 항아리
항아리에게
무서운 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빈 집에 살던 주인이
버리고 간 항아리인데요
껌껌해서 무섭고 끝이 없을 것 같은
속이 보이지 않는 입을 가진 항아리
전에 살던 사람이
쌀이나 간장 된장들로
입을 막아 놔서 할 말을 안고
살았다는 듯이 거침없이 그 입에서
시정잡배나 할 말들을
쏟아내는 거예요
입 속을 한참 들여다봐도
쌓이고 쌓인 원한의 바닥이
무척 궁금했어요
크고 작은 말들을 얼마나
그동안 뱉지 않고 살았나
장독대가 무척 시끄러웠어요
전 주인을 원망도 많이 했지만
생각을 달리 먹기로 했어요
그 입들마다 연꽃을 가져다 띄워 놨더니
원한의 말들은 온데간데없고
입이 그제서야 공중에다
한 말씀을 근사하게 차려 놓더군요
나희덕, 빛은 얼마나 멀리서
저 석류나무도
빛을 찾아나선 삶이기는 마찬가지
주홍빛 뾰족한 빛이
그대로 아, 벌린 입이 되어
햇빛을 알알이 끌어모으고 있다
불꽃을 얹은 것 같은 고통이
붉은 잇몸 위에 뒤늦게 얹혀지고
그동안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사랑의 잔뼈들이
멀리서 햇살이 되어 박히는 가을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어도
빛을 찾아나선 삶이기는
마찬가지, 아, 하고 누군가 불러본다
고진하, 새가 울면 시를 짓지 않는다
벵골 땅에서 만난 늙은 인도 가수가
시타르를 켜며 막 노래를 부르려 할 때
창가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울자
가수는 악기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저 새가
내 노래의 원조(元祖)라고
그리고
새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울음을 그치고 날아갈 때까지
노래 부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도
새가 울면
시를 짓지 않는다
고증식, 기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본다
늘 지나치던 저 겨울 숲도
훨씬 깊고 그윽하여
양지 바른 산허리
낮은 무덤 속 주인들 나와
도란도란 햇살 쪼이며 앉아 있고
더러는 마을로 내려와
낯익은 지붕들을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살아있는 것만 빛나는 게 아니다
가볍게 떠다니는 영혼들이
햇살 속에서 탁탁
해묵은 근심을 털어내고 있다
박용하, 행성
그러니까 매순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깐 매순간 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날아야 한다
매순간 심장을 날아야 한다
그러니까 심장을 날기 위해선
매순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사는 곳이
늘 가장 깊은 곳
그러니까
우리 겨드랑이보다
우리 어깻죽지보다 넓은 곳은 없어라
그러니까
우리 눈동자보다
우리 머리카락보다
우리 손등보다 깊은 곳은 없어라
그러니까 매순간 빛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매순간 어둠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살아야 한다
매순간 심장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깐 심장을 살기 위해선
매순간 죽어야 한다
그러니까 매순간 태어나야 한다
그러니까 매순간 삶을 까먹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