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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희, 달의 흔적
그날 낮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을 때
산언덕 층층나무 계단에서 흰 얼룩을 보았다
바닷물이 층층나무 꼭대기까지 밤새 잠겼다 빠졌을까
소금기 같은 흰 얼룩이 생겼다
해안선 따라 모래사장에 그려진 파도무늬처럼
나무계단에 물거품 이는 파도 출렁이고 있다
언젠가 새조개 속껍질에서 저 층층의 무늬를 보았다
부드러운 속살을 떼어낸 자리 양수물이 남긴 파도 무늬
달이 바닷물을 따라 들어왔다 나가며
새조개 속살을 여물게 한 힘이다
내 어머니의 배에도 저런 파도무늬가 숨겨져 있다
초승달과 만월이 교대로 떠오르는 동안 겹겹이 생긴 주름에
파도무늬가 깊이 새겨졌다
층층나무 계단의 저 파도무늬는 생명을 가진 흔적
지난밤 한 생명을 층층나무 계단에 잉태시켰다
다시 만월을 기다려야 할 시간이다
김소연, 바깥에 사는 사람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사람은
가장 바깥에 산다 그곳은 춥다
버스에 외투를 벗어두고 종점에서 내린 적이 있다
다른 나라 더운 도시의 공항이었다
맨발로 비행기에 올라 더 멀리 나는 갔었다
옆자리에는
같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의 이어폰에서 찌걱찌걱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같은 이별을 경험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때 그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한 사람은
내가 벗어둔 외투를 챙겨 입고
혹독한 겨울로 무사히 들어갔을까
버스 종점에서만큼은
커피 자판기가 달빛보다 더 환하면 좋겠다
동전을 넣고 손을 넣었을 때
산 짐승의 배 속에서 꺼낸 심장처럼
뜨근한 것이 손에 잡히면 좋겠다
어떤 나라에서는 발이 시리지 않다
어떤 나라에서는 목적 없이 버스를 탄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는 한없이 걸어야 한다
피로는 크나큰 피로로만 해결할 수 있다
사랑이 특히 그러했다 그래서
바깥에 사는 사람은
갈 수 있는 한 더 먼 곳으로 가려 한다
임보, 천국의 문
세상의 종말이 왔다
이 지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 하나씩만 가지고
저 세상에 가도록 허락했다
어떤 자는 무거운 황금 뭉치를 낑낑대며 지고 간다
어떤 자는 애인의 손을 잡고 시시덕거리며 간다
어떤 농부는 씨앗 주머니를 소중히 안고 가기도 하고
어떤 어부는 큰 그물을 메고 가기도 한다
말을 타고 가는 자도 있고
수레를 끌고 가는 자도 있다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그런데
천상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에게만 문이 열렸다
병든 노모를 업고 온
가난한 등대지기였다
유홍준, 사람을 쬐다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정호승, 나무
사람들은 한해를 하루처럼 살지만
나무는 하루를 한 해처럼 삽니다
사람들은 나무에 기대어 자주 울지만
나무는 사람에게 기대어 울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버리지만
나무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