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효림, 길을 가며
얼마나 많은 발길이
내 여린 가슴을 밟고 지나갔는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밟힌 가슴의 상처가 살아난다
오늘은 내가
발자국을 남기며 길을 간다
나도 지나가고
다른 많은 시간이 지나간 뒤에
바람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밤이 찾아오면
내가 밟고 간 상처 때문에
이 길도 잠을 못 이룰까
박성우, 강에게 미안하다
돌멩이 던져올리고는
방망이로 날려댄다
터엉텅 터엉텅
알루미늄 야구방망이가 운다
내 안에서 나와
터엉텅 터엉텅
나가떨어지는 울음소리를
강물이 받아삼킨다
첨벙첨벙
강물은 지치지도 않고
푸른 지느러미 힘차게
돌멩이를 낚아채간다
터엉텅 터엉텅
가슴을 내리쳐도
가라앉지 않던 응어리들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슬프고 분한 것들을
죄다 삼켜 먹게 하고는
강에게 미안하다
권정우, 주름
강물에 난 주름을 바람이
자세히 읽는 걸 바라보다가
당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던가
새하얀 새 한 마리
바람에 새겨진
투명한 주름을 따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던가
산의 주름인 능선
그 너머로 날아갔던가
그날 하루가
우리 가슴에
주름으로 새겨졌듯이
잠 깨고 나면
우리의 생도
한 줄 주름으로 남을 것인가
누구의 가슴에
아름다움 주름을 남기려고
이렇게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허영숙, 섬긴다는 말
잘 들어가지 않는 못을 아슬아슬하게 박아두었더니
못은 어디가고 못자국만 남았다
벽은 끝내 못을 섬기기 못하고 밀어냈다
철마다 벽에 붙어있던
국민을 섬기겠다는 말
벽보가 뜯겨지자마자 그 말도 떨어져 나갔다
얕은 것은 아무것도 섬기지 못한다
그래서 당신도 나를 빠져 나갔다
하종오, 남북상징어사전
내가 '산등성마루' 로 올라갈 때
너는 '상수리' 로 올라간다고 말해서
같이 산행을 하면서
상수리나무 열매로 올라가는
너를 상상하고는 갸웃했다
내가 '드라이클리닝' 할 옷을 맡기러 세탁소 갈 때
너는 '화학빨래' 를 시키러 가느냐고 묻고
내가 '원피스' 를 입은 너에게 멋지다고 칭찬했더니
너는 '달린옷' 이 멋지지 않느냐고 되물어서 멋쩍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가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를 따러 가자고 청했을 때
너는 '조국의 앞날을 떠메고 나갈 어린 세대' 를 딸 수 없다고 거절했고
내가 나는 '사람' 이다고 주장했을 때
너는 내가 '혁명과 건설의 주인' 이 아니다고 부정했다
'꽃봉오리' 와 '사람' 이란 각 낱말의 상징을
우리가 각각 다르게 해석해서 쓰던 그날부터
둘 중 하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낱말을 버려야
한곳에서 같이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