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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가전제품은 모두 소리를 낸다
어머니 장례식 치르고 돌아온 날
한평생 손수 밥 한 끼 차려본 적 없는 아버지에게
전기밥솥 사용방법을 가르쳐드린다
아버지, 쌀을 이렇게 씻어서
물 요만큼만 넣고 뚜껑을 닫고
이걸 누르시면 됩니다
시간이 되면 밥이 다 되었다고
알람이 알려줍니다
밥을 퍼 드시면 되요
집에 들어오니 벽에 걸린 어머니 옷에서 체취가 풍겨온다
한평생 손수 옷 한 번 빨아 입어본 적 없는 아버지에게
전기세탁기 사용방법을 가르쳐드린다
아버지, 옷을 이렇게 넣어서
가루비누 요만큼만 넣고 뚜껑을 닫고
이걸 누르시면 됩니다
시간이 되면 빨래 다 되었다고
알람이 알려줍니다
빨래를 꺼내 널면 돼요
자주 내려올게요 아버지
어머니 안 계신 집에서
울 아버지 홀로 살아가게 되었다
아니, 전기밥솥, 전기세탁기, 진공청소기, 냉장고, 텔레비젼
칭얼거리는 가전제품들을 돌보며
살아가게 되었다
황인숙, 묽어지는 나
설거지를 마치고
묵직한 스펀지를 내려다보다
헹구지 않고 그냥 두었다
한번쯤 더 쓸 만하게
한바탕 거품을 품고 있었으니까
이상하다
거품이 일지 않는다
어제는 팔팔했는데
괜히 기진맥진한 오늘의 나
거품이, 거품이 일지 않는다
쓰지 않아도 저절로
소진돼버리는
생의 비누 거품
이갑수, 소문
왕성한 소문이
웅장한 건물에서 나와
웅성한 사람들 속으로 흘러들었다
우스운 것들이 실은
무서운 것들이야
쥐 한 마리가 태산을 흔드는 것을 보렴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귓속으로 들어가서는
대단한 일이 되어 입으로 나왔다
이빨은 고드름같이 자라서
사람들 가슴을 할퀴곤 돌아다녔다
저지른 바가 있는지
제지하는 이 아무도 없었다
상처는 흉터로 남고
사람들은 흉가에 남았다
그림자 없는 소문들 앞에서
그림자 있는 것들이 벌벌 떨고 있었다
이상국, 달동네
사람이 사는 동네에
달이 와 사는 건
울타리가 없어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지붕 꼭대기에
달의 문패를 달아 주었다
이가림, 쇠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만
그렇게 쉽게 뺄 수 없는 게
바로 그 쇠뿔
원래 뿔 각(角)은
깨달음의 각(覺)이기도 하므로
각각 다른 것이면서
하나인 것
어쩌다
쌍갈고리 같은 쇠뿔을
휘어잡는 수가 있으나
번번이
내 이마를 치받고
달아난다
아아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쇠뿔 하나 붙잡는 데
백 년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