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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일, 우물
달이 놀다 간 우물
댓잎 하나 떨어져 있다
어머니 두레박으로 퍼 올리던
저, 기
한참 맴돈다
하현달이 함께 맴돈다
신달자, 가정백반
집 앞 상가에서 가정백반을 먹는다
가정백반은 내 집에 없고
상가건물 지하 남원집에 있는데
집 밥 같은 가정백반은 집 아닌 남원집에 있는데
집에는 가정이 없나
밥이 없으니 가정이 없나
혼자 먹는 가정백반
남원집 옆 24시간 편의점에서도 파나
꾸역꾸역 가정백반을 넘기고
기웃기웃 가정으로 돌아가는데
대모산이 엄마처럼 콧물을 흘쩍이는 저녁
박창기, 순천만에서 바람을 만나다
그대가 처음
내게로 왔을 때처럼
놓고 가는 것 또한 우연이면 좋겠네
산자락 넘어오는 그대
바다나루 건너오는 그대
몸은 이미 지나고 마음만 뒤에 남아
갈잎 흔들며 흔들며
갯내음 사발로 들고 오는 그대
그대를 만나서는
그대가 지피는 세찬 불에
한참이나 등신불이 되고 있었는데
그것도 잠시
내 속에 가두어둘 겨를도 없이
가는 일도 기약 없는 약속처럼
우연이면 좋겠네
우연도 순간이어서
기쁨처럼 아픔도 그러했으면 좋겠네
이경임, 야누스의 나무들
몸의 반쪽은 봄을 살고
몸의 반쪽은 겨울을 산다
꿈의 반쪽은 하늘에 걸어두고
꿈의 반쪽은 땅속에 묻어둔다
마음의 반쪽은 광장이고
마음의 반쪽은 밀실이다
생각의 반쪽은 꽃을 피우고
생각의 반쪽은 잎새들을 지운다
집의 반쪽은 감옥이고
집의 반쪽은 둥지이다
김중식, 모과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까맣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의지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망신(亡身)의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