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옥, 맨홀
지상의 길마다 박혀 있는 달을 본다
밑바닥에서 오래 명상한
저 딱딱한 달
길을 가다가 가끔씩
뚜껑을 확 열어젖히고 싶을 때가 있다
달의 내부에는
무수한 빛의 입자들이 출렁거리며
그림자를 만들고
은밀한 시간 위로 솟구치는 더운 숨결
단 하루라도 둥둥
허공에 떠올려 주고 싶어
가장 어두운 것들도 한번쯤은
치솟고 싶을 때가 있다
검은 달을 보면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정원도, 귀뚜라미 생포 작전
어떻게 들어오셨는지
남은 여름마저 몰아내려고 열어둔 창문 사이로
귀뚜라미 한 마리 아장아장
거실 안으로 뛰어든다
그냥 두면 누구의 발에 압사 당할지 알 수 없으므로
밖으로 돌려보내자고 생포하기로 하는데
그는 남의 속도 모른 채
붙잡히지 않으려고 잽싸게, 애타게 달아난다
이런 것이 짝사랑일 것이다
그냥 콱 움켜잡기는 쉬운데
손아귀 속으로 귀하게 모시자니 어렵다
지금 그를 생포하는 것은
이 가을을 다 생포하는 것이므로
사력을 다해 따라다니다가
손 안에 모시는 행운을 잡았는데
혹시나 저를 해치는 손길일까
버둥대는 몸짓
고이 풀밭에 내려놓는다
이 가을을 고스란히 내려놓는다
전미정, 걸쳐야 산다
언제부턴가 한 사람만 사귀지 않는다
갑자기 혼자 남겨지는 일이 두려워
이 사람 저 사람 걸쳐 사귄다
잠을 자면서도 깨어 있고
말하면서 침묵하는 법을 배웠고
가면서도 가지 않으며
웃으면서도 울고 있고
만나면서도 헤어지고 있었고
올라가면서 내려가는 법을 익혔고
칭찬하면서도 욕하고 있으며
열어주면서 잠그고 있는
모두 따지고 보면
하나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걸친다
자꾸 자꾸
권순진, 그대 떠난 뒤
허약한 약속 허물어진 뒤 짦은 입맞춤
진한 내출혈의 커피
윗입술의 붉은 추억 대신
아랫입술 검은 기억 깨물다
빛깔만 나누고 돌아와 누운 자리
사방팔방 무늬만 쇠창살처럼 무거워 눈을 감는다
뒷모습 보이기 전 왜 긴 말이 필요치 않았던지
흙벽에 기대어 하늘이라도 보았다면
언 땅 긴 그림자로 누워 기억의 끄나풀 하나 당길 때
철컥 자물쇠 다시 잠기는 소리의 높은 음계
팔뚝 정맥 고스란히 스며든 너의 불꽃
너에게 붙들린 3악장
애써 맨얼굴로 비벼 끈다
그 눈에 담긴 한 폭의 그림
그 입술에 묻은 한 소절의 노래
내 마음의 지평선까지
데인 상처 긴 비명으로 남을지라도
정호승, 씨앗
엄마가 날 낳기 전
나는 무엇이었을까
오월의 나뭇잎에 어리는 햇살이었을까
길가에 핀 한 송이 작은 풀꽇이었을까
아니면 남해의 어느 섬 절벽 위에 둥지 튼
바다새의 작은 새알이었을까
아마 엄마가 날 낳기 전
나는 엄마의 사랑의 마음이었을 거야
마음의 중심에 있는
작은 씨앗이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