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아, 한 그릇
한 사람을 등지고 돌아온 날
노곤한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놓는다
부엌에 그림자처럼 스며들어 뒤주를 연다
오래 묵은 글자들을 한 바가지 퍼올리고
꼬들꼬들 헹궈내어 밥을 안친다
행간은 따로 잘라 칼집을 내고
뜯어 온 문장에 또르르 말아
김 오른 찜통에 넣어놓는다
작별의 시간이 저무는 시간
오래도록 닫혀 있던 밤의 창문을 연다
안개의 분말을 눈물과 섞어
오래도록 찰지게 반죽을 하고
지나온 시간만큼 발효시킨 뒤
예열한 달빛 아래 얹어놓는다
엉겨 있는 별빛을 한 숟갈 넣어
조물조물 손맛 더해 무쳐 내놓고
한때의 웃음을 얇게 저미어
탁탁탁 날선 칼 가는 채 썰어
종지그릇에 보기 좋게 담아놓는다
한 사람을 등지고 먼 꿈길 걸어온 날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마음에
시 한 그릇 푸짐하게 지어 올린다
송계헌, 푸른 눈썹
눈썹 아래 푸른 숲을 가꾸면 어떨까
산사나무 둥근 열매와
보랏빛 현호색 향기 가득 채운다면
내 안의 얼룩들로 자주 꿈틀거리는 눈썹
바람만 스쳐도 붉히고 마는 눈시울
우레처럼 놀라 꼬리가 지워지고
눈썹도 하 세월을 견디기 어려웠을 테니
세상의 흙먼지를, 빗 낱을
받아내기 힘들었을 테니
바람 불 때마다 신음소리 새어나고
조각달에 한 올씩 눈썹 빠뜨리는
저문 날들 속에서
눈썹 아래
푸른 하늘과 바다를 글썽이면 어떨까
순한 새들, 물고기들 출렁인다면
세상의 등짐 실은 화물선 한 척
눈물바다로 넌즈시 통과할 터이니
이성복,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힌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정호승, 나무에 대하여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박남준, 참을 수 없는 슬픔
눈물처럼 등꽃이 매달려 있다
모든 생애를 통하여 온몸을 비틀어 죄고
칭칭 휘어 감어 오르지 않으면
몸부림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슬픔의 무게로
다만, 등나무는 등꽃을 내다는 게다
그것이 절망이다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