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일, 봄비
밤새 누에 뽕잎 갉아먹는 소리
자다 깨어 간지러운 귀를 판다
세상 잘못 살아온 나를
어디 멀리 있는 이가 욕을 하는지
귓속 간지러움 밤새 그치지 않는다
잎에서 잎맥으로 잎줄기로 옮겨가며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내 귓속 간지러움도 달팽이관을 따라
점점 깊은 곳으로 몰려간다
세상 함부로 살아온 나를
이제는 가까이 있는 누가 욕을 하는지
뽕잎 갉아먹는 소리 갈수록 거칠어지고
자다 깨어 죄 지은 사람처럼
무릎 꿇고 앉아 간지러운 귀를 판다
신배승, 산벚꽃
어쩌면 누구인가
아픔을 키우고 키워서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때
그 아픔의 옹이에
꽃을 걸어둔 것이겠지
누가 이 깊은 마음 속에
이토록 많은 아픔을
걸어 두었느냐
정끝별, 늦도록 꽃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묻어둔
봄 맘을 훔친
희디 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
가다가 뒤 돌아보았을 뿐인데
떠가는 꽃잎이라
제 그늘만큼 봄빛을 떼어가네
늦도록 새하얀 꽃잎이
이리 물에 떠서
구재기, 꽃 속에 들다
꽃 속에 들면
내 몸에서 향기가 난다
꽃 속에 들어
꽃대를 타고 땅 속에 들면
지구의 저쪽 이민족의 향기까지 밀려 온다
꽃 속에 들면
내 마음에 열매가 돋아나고
벌 나비가 남긴 자리
제 각기 알맞은 빛깔을 찾아
이적지 가지 못한 푸른 광장을 만난다
그리고, 꽃 속에 들면
낯선 곳 낯선 얼굴도 하나가 된다
이영광, 아득한 전생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면
여기, 없겠지요
별안간 목련 그늘이 다정히
문 열어준 빛의 길로 걸어오는
추억을 보고 있지 못하겠지요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면
어디선가 본 듯한 그가 저만치
하얗게 앉아 있는
부활 이후이고
당신은 아득한 전생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