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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귀로 듣는 눈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최승헌, 추억을 해부하다
지나간 날을 뒤돌아보며 추억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 말에 묻혀 가고 싶지 않다
그건 나와는 상관없이 생짜배기로 빼앗긴
내 인생의 살점들이다
그동안 추억이라는 명분으로 빼앗긴 게 얼마나 많은지
마치 세금을 거두어 가듯, 내게서 챙겨 간 것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추억도 회오리바람처럼 사납게 몰아칠 때가 있어
내가 붙잡을수록 탕진하는 것이 더 많다
생각해보니 청춘이 내 뼈와 살을
허겁지겁 먹어치울 땐 몰랐다
싱싱하고 달콤한 맛에 취해
쓴 맛 같은 생이 내 안으로 기어 들어와
나를 조금씩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별이 추억으로 위장하여 숨어있었으나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찾을 수 없어
나는 추억의 먹잇감으로 살아온 것이다
이만섭, 실밥
허름한 옷에서 밥 짓는 냄새가 솔솔 난다
한 몸 가리어 풍상을 견디다 보니
뜯긴 솔기 사이에서 앵돌아 나오는 밥
기제사에 메를 짓고 내오듯
밥은 끈기 잃어 퍼석퍼석하다
그간 옷은 얼마나 말 못할 거식증에 시달린 것일까
육감적으로 부끄러운 표정이다
몸의 접경지대에서 오랜 세월 부지하며
어미의 탯줄 같은 실을 빌어 옷을 먹여 살리더니
이제 저렇게 고수레처럼 문 밖에 내놓는다
산목숨인들 밥 거두면 그만일진대
아무리 옷인들 아니 그럴까
세월마당에 낡아진 옷이
실밥을 지어놓고 도대체 후줄그레하다
황구하, 밥, 말씀
마루에 앉아 밥을 먹는데
그가 대문 앞에 쭈빗쭈빗 서 있었다
엄마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밥 한 덩이 퍼 담은 바가지에 서너 찬을 얹어
아래채 마루에 놓아주었다
그는 말없이 허리를 조아리더니
마루에 오르지도 않고
뜰팡에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었다
자꾸 고갤 돌리는 어린 나에게
엄마는 눈을 꿈적꿈적하였다
어느 사이 그는 보이지 않고
덩그러니 마루에 혼자 남겨진 바가지
들고 오며 보았다, 바가지 한쪽
잘 모두어 놓은 밥 한 숟갈
그가 남기고 간, 한 말씀
조혜전, 고층 아파트
원고지다
불 켜진 창마다
언어가 사는
불 꺼진 창마다
언어가 숨는
소설이다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