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세계화
얼마 전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한국에 출판되어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부의 재분배를 강조하는 그의 저서가 뜨거운 관심을 받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불평등함을 반증한다. 한국 사회는 IMF 금융위기를 이래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후 양극화로 대표되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했는데,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선진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 글에서는 세계화의 경제적 측면인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탄생 배경과 그 확대과정을 파악하고자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국제 경제질서의 재편 - ‘브레튼우즈 체제’의 성립과 경제적 호황기
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면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마비된 국제 경제 질서를 제도적 규범을 통하여 다시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설립을 골자로 한 ‘브레튼우즈 체제’가 성립되었다. 세계은행은 전쟁으로 파괴된 세계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장기로 자금을 대출해 주는 역할을 맡았으며, GATT는 관세를 인하함으로써 무역의 자유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IMF는 전 세계 국가들에게 단일하게 적용될 국제적 통화질서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는데, 당시 전쟁으로 인하여 세계 금 보유량의 60%는 미국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달러가 기축통화가 되었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 미국은 금 1온스 당 35달러로, 달러와 금의 교환비율을 정하고, 고정환율제를 도입하기로 각국과 합의하였다. 한편 고정환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제수지를 조정하는 문제가 필수적이기에 IMF의 실질적 역할은 외환이 부족한 나라에게 대출을 해주는 것이었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완성함으로써 세계경제질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은 미국은 ‘마셜플랜’을 통해 유럽 경제의 회복을 도모했다. 유럽 경제의 회복은 미국의 새로운 수출 시장 확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적 생산방식이 유럽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노동생산성이 증가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또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유럽에 배치된 미군은 서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군사비 지출을 경제 복구와 사회 복지 비용에 전념하게 하여 전쟁 기간 동안 강력해진 노동계급의 불만을 무마시킬 수 있었고, 동유럽에서 확산되는 공산화를 저지시킴으로써 유럽 내 미국의 헤게모니는 강화되었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경제가 부흥했다. 본래 미국의 동아시아의 전략적 파트너는 중국이었으나,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장에 큰 우려를 나타냈다. 그렇기에 미국은 공산주의 확장에 제동을 걸고자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일본의 경제재건 및 재무장을 결정했다. 특히 일본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배후 기지 역할을 하면서 일본의 수출은 1945년부터 52년 사이 약 세 배가 늘어났으며 한국전쟁 기간 내내 일본이 거둔 수입은 약 24억 달러에 달했다. 또한 국가주도개발정책으로 조선, 철강, 자동차 부분을 핵심적으로 육성했고, 높은 관세로 자국 산업을 보호했으며,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배상협정을 마무리하고 이 지역에서 천연자원을 수입하는 한편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삼았기에 일본은 세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한국·대만·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은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 국가들은 공산주의 국가들과 인접해 있었기에 공산화를 저지시킨다는 미국의 이해와 맞닿아 있었다. 그렇기에 이 국가들에게는 미국의 막대한 원조가 이어졌으며, 일반특혜관세제도를 적용하여 싼값에 자국 상품을 미국과 유럽에 수출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한편 일본처럼 자국시장을 높은 관세로서 보호하는 것을 허락했다. 또한 저임금 노동력 역시 경제 발전의 요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 국가들은 신흥공업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기존의 1차 상품 수출에서 벗어나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통해 경제 발전을 추구하였다. 그렇기에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국가들은 해외 자본을 유치해 산업화를 진행하여 실제로 60년대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전후 전반적인 세계 경제 호황기 속에서, 그동안 경제적으로 낙후됐던 국가들이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새로운 국제 분업’적 질서가 나타났다. 즉 저개발국가의 1차 산품과 2차 산품이 불평등하게 교환되는 구조에서 벗어나 공산품을 제조하고 수출하면서 세계 경제의 발전과 그 맥락을 같이 한 것이다.
2. 불황과 신자유주의의 등장 및 금융세계화
하지만 세계 경제는 70년대에 이르러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미국경제는 60년대 말부터 이윤율의 하락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이유로는 후발 국가들의 제조업 발전을 통한 미국 내 산업생산이 저하된 것과, 베트남전 참전을 통한 엄청난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라는 쌍둥이 적자를 겪은 점을 들 수가 있다. 이는 인플레이션과 달러 가치의 실질적 하락을 가져왔으며, 미국에서 금의 급속한 유출을 가져와 1971년 미국은 금태환금지조치를 발표하였고, 이후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는 등 사실상 브레튼우즈 체제의 해체를 가져왔다. 더욱이 1974년에 발생한 오일쇼크는 불황을 더욱 전면화하였다. 미국의 위기는 곧 세계로 퍼져나갔고, 불황은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와 고임금 정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기존의 케인즈주의적 노선을 버리고 등장한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노선은 복지를 비롯한 공공자금 축소, 법인세 감면을 비롯한 기업의 세금 대폭 인하, 노동시장 유연화, 공기업의 대거 민영화, 노조 무력화 등을 주 골자로 한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바탕으로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금융세계화를 통해 제조업 기반의 실물경제보다는 금융을 통해 이윤율을 반등시키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자유로운 금융거래가 전제되는데,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는 이를 가능하게 했다. 실제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의 외환거래는 국가의 감독과 허가가 필요했지만, 이것이 폐지되면서 금융자본의 자율성이 급격히 증대되었다. 한편 당시 금융자본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국가들에 몰려있었다. 석유파동으로 떼돈을 번 중동 국가들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 돈을 예치했으며, 마셜플랜 이래로 유럽에 뿌려진 달러는 당시 영국의 시티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로달러시장에 모여 있었다. 이 돈을 바탕으로 금융자본들은 당시 산업화가 진행되던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지역에 막대한 투자를 했는데, 실제로 70년대 초 라틴아메리카에 투자된 금액은 1,000억 달러 수준이었지만, 81년에는 무려 6,000억 달러에 달했다.
3.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확대와 금융세계화의 가속화
선진국에서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처음으로 확대된 곳은 라틴아메리카였다. 발단은 1982년 미국의 급격한 금리인상이었다. 금리가 15%를 상회하자 투자금들은 회수되어 미국으로 돌아갔고,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은 막대한 이자를 물어야 했다. 결국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IMF는 조건을 내걸었다. 먼저 긴축정책을 통해 국제수지를 개선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 교육, 보건과 같은 사회복지 정책의 지출이 급격히 줄어들어 사회적 안전망이 붕괴되었다. 두 번째 조건은 공기업을 민간에 매각시켜 단기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효율성을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전화, 수도, 전력, 통신, 도로, 석유와 같은 공기업들이 민영화되었다. 비록 민영화를 통해 부정부패와 방만한 운영 등은 개선되었지만, 이들 기업의 대부분은 외국인들이 매입하였고 요금 인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효율성을 추구했기에 공기업 본래의 목적인 공공성은 퇴색되었다. 마지막으로는 국내 금융시장 개방이었는데, 이 결과 외국 금융 자본이 보다 더 자유롭게 라틴아메리카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개혁조치는 일시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를 회복시켰지만 라틴아메리카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되는 장기불황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사회 양극화는 심해졌고, 외채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이렇듯 80년대 남미에서의 신자유주의의 실험이 계속되는 가운데, 90년대 초 ‘워싱턴 합의’라는 채무국의 이행 조건에 대한 논의의 구체적인 틀이 완성되었다. 여기서 특징짓는 부분은 앞서 언급한 구조조정 보다는 이를 개별 국가에서 관철시키기 위해 어떤 전술을 사용해야 하는가를 정리한 부분이다. 첫째, 구조조정에는 대상의 선거제도를 잘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기존 정권은 자신의 정책 기조로 인해 구조조정에 임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중도 성향을 가진 2개의 정당이 연합하여 정권을 잡을 때 구조조정이 가장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권교체는 대통령의 개혁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정책의 본질이 쉽게 감춰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대통령 권한의 확대이다. 이를 통해 반발을 무시하고 개혁을 추진시킬 수 있다.
워싱턴 합의를 바탕으로 펼쳐진 세계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바람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 진영으로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고르바쵸프의 등장 이후 도입된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의 도입 시도는 소련의 해체를 앞당겼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등이 받아들인 방식은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구체적으로 가격자유화, 국가의 보조금 축소, 민영화, 무역자유화 및 자본시장의 구축 등이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같은 공산진영인 중국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경제적인 분야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며 점진적인 형태로 개방으로 나아가 세계화에 편승했던 점과 매우 달랐다.
1980년대부터 아시아에서는 특히 기존에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특혜를 받으며 성장했던 신흥공업국에게도 개방의 압력이 행해졌다. 먼저 이들 국가들에게 주어졌던 일반특혜관세제도가 폐지되었다. 또한 한국과 미국의 ‘슈퍼 301조 협약’ 체결의 예를 보듯 이들 국가의 무역장벽을 폐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들의 OECD 가입은 자본자유화를 정책에 반영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금융자본의 진출이 한결 용이해졌다.
하지만 아시아 지역에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확대된 것은 1997년 경제위기부터였다. 위기의 발단은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였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80년대에 연평균 9%의 고도성장을 지속하였는데, 섬유, 의류, 신발, 가전제품 등이 주 품목이었다. 하지만 1996년 수출이 급감하면서 여기에 대출한 부실채권이 문제를 일으켰다. 또한 이들의 경제성장은 순전히 외국 자본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막대한 외채를 지고 있었는데, 경기가 후퇴하면서 기업이 대거 도산하고 경기가 급속히 위축되자 외국자본들은 급속히 태국을 빠져나갔다. 또한 위기를 감지한 환율 투기꾼들이 바트화를 공격하면서 문제를 더 부채질했다. 문제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홍콩, 한국으로까지 이어져 이들 국가에서 외국 자본들은 급격히 빠져나갔다. 결국 이들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고, 구조조정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질서에 편입되었다.
4. 현황과 과제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세계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사회양극화의 척도로 쓰이는 소득5분위배율이 1996년 4.74배에서 2010년 7.74배로 늘어났다. 미국은 지난 50년간 법인 소득세는 줄어들었으나, 개인 소득세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이와 더불어 기업의 자유로운 이윤 추구를 위해 시행되는 비정규직, 파견 근로는 노동자들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있으며, 정리해고는 한순간에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또한 이러한 소득불균형을 재분배할 사회복지제도 역시 신자유주의적 질서에서 금기시하기에, 사회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또한 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기에 이를 둘러싼 무한경쟁을 야기 시키며, 인간은 기업이 원하는 능력과 노동의욕을 가진 노동력으로써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 속에서 인간은 소외되어가고 사회는 점점 더 물질만능주의로 치달아가고 있다.
또한 금융자본이 국민국가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점 역시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다. 한미FTA의 예에서, ISD는 금융 자본이 투자국 정부정책 등으로 손해를 봤을 때 국제중재기구에 제소해 손해배상을 청수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는 투자자에 이해에 따라 국내법을 문제 삼을 수 있고 또 그 개정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실제로 국가의 사법질서를 무시하고 무력화할 수 있다.
그리고 지속적인 국제적 금융위기의 발생 역시 짚고 넘어가봐야 한다. 실제로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아이슬란드, 우크라이나, 헝가리 등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또한 2012년 그리스발 경제위기에서 보듯 비교적 작은 규모 국가의 경제위기도 여러 나라의 경제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금융위기는 본질적으로 초국적 금융자본의 투기로 인한 것이다. 1995년 멕시코 위기 및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가 투기자본의 급속한 이탈에 있었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개인의 부실채권을 묶어 발행한 부채담보부채권이 그 원인이었음을 볼 때 금융위기의 책임은 금융자본에게 있다. 하지만 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들에게는 공적자금이 투여되어 살아났고, 일반 민중들에게는 다시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권유’한다. 금융위기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일반 민중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신자유주의적 질서 및 금융자본의 확대를 중심으로 진행된 세계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확실한 점은 이러한 방식의 세계화가 부자는 더욱 부를 늘려가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전 세계적으로 세계화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초국적 금융자본을 규제하기 위해 피케티는 자본세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과연 세계화가 옳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의문을 던져보고 싶다. 스티글리츠의 말처럼 ‘온건한 세계화’는 없을지, 아니면 더 나은 대안이 있는지 더욱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