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 파도
누가 저렇게 푸른 종이를 마구잡이로 구겨 놓았는가
구겨져도 가락이 있구나
나날이 구겨지기만 했던
생의 한 페이지를
거칠게 구겨 쓰레기통에 확 던지는
그 팔의 가락으로
푸르게 심줄이 떨리는
그 힘 한 줄기로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궁극의 힘
고정희, 망월리 비명(碑銘)
한 세대 긋고 지난 업보가 어디
망월리에 잠든 넋뿐이랴만
한 시대가 쌓아올린 어둠의 낟가리에
불쏘시개 되어 하늘 툭 틔우고
황산벌 슻가마로 묻힌 저들이
오늘은 가는 달 붙잡고 묻는구나
내 죄값을 달에게 둗는구나
한 세대 긁고 지난 칼 자국이
어디 내 죄값뿐이랴만
매가 달과 마주서니 속물일 뿐이어서
국화 한 다발도 속될 뿐이어서
달로 떠오르는 네 외짝눈과 만나니
부끄럽구나
한 평 땅 덮지 못할 내 빛
무력한 근심이나 보태는 오늘
오세영, 구름
구름은
하늘 유리창을 닦는 걸레
쥐어짜면 주르르
물이 흐른다
입김으로 훅 불어
지우고 보고, 지우고
다시 들여다보는 늙은 신의
호기심어린 눈빛
배한봉, 복숭아를 솎으며
열매를 솎아보면 알지
버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 처음엔
열매 많이 다는 것이 그저 좋은 것인 줄 알고
아니, 그 주렁주렁 열린 열매 아까워
제대로 솎지 못했다네
한 해 실농(失農)하고서야 솎는 일이
버리는 일이 아니라 과정이란 걸 알았네
삶도, 사랑도 첫 마음 잘 솎아야
좋은 열매 얻는다는 걸 뒤늦게 알았네
나무는 제 살점 떼어내는 일이니 아파하겠지만
굵게 잘 자라라고
부모님 같은 손길로 열매를 솎는 5월 아침
세상살이 내 마음 솎는 일이
더 어렵다는 걸 알았네
서안나, 등
등이 가려울 때가 있다
시원하게 긁고 싶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
그곳은 내 몸에서 가장 반대편에 있는 곳
신은 내 몸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만드셨다
삶은 종종 그런 것이다
지척에 두고서도 닿지 못한다
나의 처음과 끝을 한눈으로 보지 못한다
앞모습만 볼 수 있는 두 개의 어두운 눈으로
나의 세상은 재단되었다
손바닥 하나로는 다 쓸어주지 못하는
우주처럼 넓은 내 몸 뒤편엔
입도 없고 팔과 다리도 없는
눈먼 내가 살고 있다
나의 배후에는
나의 정면과 한 번도 마주보지 못하는
내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