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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백일장]
게시물ID : readers_148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탈리아구두
추천 : 4
조회수 : 1153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8/14 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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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여행과 같습니다. 
여행을 떠나세요 

find me 

-1-


시끄러운 경적소리에 눈을 떴다. 점점 멀어지는 배기음이 귓가를 괴롭혔다.

어두운 방안의 천장엔 낡은 실링팬이 우두커니 멈춰있고  얇은 커텐으로 가려진 창문은 인적 없는 밤 외로이 홀로 깜박이는 네온사인 빛을 방안에 들여놓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한참 생각하다가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을 짜집자니 머리가 아파오는것 같아 포기해버렸다.

몇시나 됐을까 입안에 술냄새가 텁텁하게 도는걸 보니 아직 술이 깨기도 전인거 같았다.  흔들리는 눈의 촛점을 잡으려고 할때 지저분하게 쩝쩝 거리며 코를 한번 세차게 고는 여자가 옆에 누워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몸 위로 힘없이 걸쳐있는 여자의 손을 살며시 잡아 돌려놓자 그녀는 웅얼 거리며 돌아누웠다.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한번 보고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를 손에 쥐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가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뒤를 돌아보니 술냄새를 풍기며 골아떨어져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기억에는 분명 예뻣던거 같은데 얼굴에 매력점이라고 생각했던것이 검은 사마귀 였고 작고 앙증맞은 코는 온데간데 없고 비가오면 물이 들이찰거 같은 들창코가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일어서서 바지를 주섬 주섬 챙겨입었다.

코트를 걸치며 문 손잡이를 쥐고 다시 오지 않을 이  낡은 호텔 방에  잊은게 없나 확인 하려던차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술병들 사이로 그녀의 핸드폰이 보였다.


소리나지 않게 다가가 핸드폰을 열고 통화기록에서 전화번호를 지웠다.


“뭐하는거야?”

그녀는 부스스한 머리를 넘기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채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즈막히 말하고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가는거야?”

네온사인 불빛이 거슬렸는지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나는 아무말없이 방을 가로질러 문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고 돌렸을때 그녀가 뭔가 웅얼거리며 말하는걸 듣고는 멈춰섰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잘가”

문을 닫기 직전에 들었지만 제대로 들은건지는 확실치 않았고 문틈새로 봤을때 가느다란 팔을 뻗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운채로 누워있던것 같다.


촌스러운 장식과 원래 고급스런 장미의 붉은색이었을 탁한 카펫이 깔린 조용한 복도를 한걸음 한걸음 딛을때마다 삐걱거리는 바닥소리가 울렸다. 

이정도로 오래된 싸구려 호텔을 찾기도 힘든데 나도 참 어지간히 급했구나 하는 생각에 한심스러웠다.

로비를 지나면서 갸울 갸울 졸고 있는 벨보이를 깨워 5달러를 주고 그녀가 나오면 택시를 태워 보내라고 했지만  

잠에 취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녀석은 지페를 주머니에 꾸깃꾸깃 집어 넣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마  그녀가 누군지 몇번방에 있는지도 모를테고 지나가는 아가씨들의 엉덩이만 쳐다보며 헤벌쭉 웃고 있을것이다. 

왜 팁을 쥐어준건지 쓸데없이 맥주 한병 값만 날렸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반짝이는 길거리가 휑한 거리와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여기 저기서 열린 파티는 이미 끝난지 오래된 후이고  술에 취해 벽을 부여잡고 구역질을 해대는 취객들과 여운을 가시지 못하고 이리 저리 헤메이며 술과 이성을 탐하는 젊은이들이 새로나운 캐롤을수 부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호텔에서 나올때만 해도 그다지 춥지 않다는 생각에  걸어서 가보자 했지만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발가락 끝이 찌릿 찌릿한것이 이대로 가다간 얼어죽을것만 같았다.

택시도 다니지 않는 시간에 버스를 기다리자니 1시간깨 정도 남은것 같아 적당한 곳을 찾아 걸었다.


칠이 다 벗겨진 문을 열고 바에 들어가자 자욱한 담배연기와 온기가 몸을 덥쳐왔다.

바텐더는 곤란한 표정으로 술에 취한 손님을 쳐다보다가 나를 보고 눈인사를 했다.


맥주를 한병 시키고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았다.

차갑게 얼어버린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자 바텐더는 뜨거운 물한잔과 맥주를 내놓았고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두손으로 물잔을 쥔면서  손을 녹였다.


벽에 비스듬이  걸려있는 낡은 아날로그 티비에는  언제 했는지 모르는 축구 경기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나오고 중간 중간 ‘어서오세요 파라다이스로’ 라는 휴양지 광고가 길게 나왔다.


텔레비젼 화면을 가득 채우는 햇살과 흰 모래사장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여자들이 뛰놀고 근육질의 남자는 세상만사 모두 가진듯한 표정으로 이 광고를 보고 있는 당신은 왜 거기에 그러고 있냐는듯한 멘트를 던졌다. 이렇게 추운날에 남태평양에 사는 놈들은 반바지를 입고 아무 생각없이 라임을 섞은 칵테일이나 마시고 돌아다니겠지 하며 그 유유자적한 삶이 부러워졌다.

현실과의 괴리감에 욕을 한번 내뱉고  담배를 찾았다.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뿜으며 핸드폰을 열었다. 부재중 전화 5통 문자메세지 13개.

전화는 무시하고 메세지를 하나씩 읽던 도중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딘? 나야”


“전화 잘못거셨네요”

전화를 끊자마자  욕으로 도배되어있는 메세지가 도착했다.

아무렇지 않게 삭제를 누르고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맥주를 한병 더 시키고는 바에 턱을 괸채로 주위를 둘러봤다. 반대편 자리에 혼자 앉아있는 아가씨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한 남자가 천천히 그녀에게 가서 말을 건넨다.

실실 거리며 웃는 남자의 얼굴이 농담을 한두마디 건네고 여자는 긴장어린 눈으로 바라 보다 폭소를 터트리듯 활짝 웃고 남자는 그녀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는다.


나는 이미 줄거리를 다 알고 있는 옛날영화라도 보는듯 관람하기 시작했다.

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걸 보니 이미 한 두잔 마신 상태일테고 남자는 취기에 자신도 모르는 용기를 내서 수작을 걸었을께 뻔했다.

여자는 이 신년 주말에 혼자 있는걸 보니 젊고 예뻤던 시절  놀던 멤버들이 하나둘씩 짝을 찾아 떠나버리고 어느새 혼자 남겨져 외로움에 몸을 쥐어짜다가 뭐라도 해보자는 식으로 나왔을 것이다. 이왕 나가는 김에 운명처럼 괜찮은 남자를 만날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것이고 그래서 사놓고 입지 않은 가슴골까지 파인 드레스를 입고 나왔을것이다. 만나서 잘 안되더라고 그냥 즐기면 될테니까 어차피 아무도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니 어떤 행동을 하던지 남을 의식할게 없고  은밀한 사생활을 누리는게 외로움에 집에 쳐박혀 있는것보다는 훨씬 나을테니까


뻔하고 의미없는 가쉽거리로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탐색전을 하겠지.

남자는 여자가 웃을때마다 술을 계속 권했고 바텐더는 바삐 술잔을 채워줬다. 그는 여자 모르게 바텐더의 손에 몇달러를 쥐어줬을것이고 바텐더는 그녀의 술잔에 럼을 평소보다 더 섞었을것이다.

여자는 이제 웃을때마다 그의 허벅지나 팔뚝을 슬쩍 터치하며 스킨쉽을 시작했고

남자는 이미 전쟁에서 상대의 수를 다 읽었다는 표정의 장군처럼 여유롭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이제 둘은 딱붙어앉아 금방이라도 키스할것 처럼 서로를 탐색한다. 여자는 술잔을 마져 비우고는 화장실을 가는듯 일어나서 걸어갔고 남자는 그런 여자의 뒷모습에 씰룩거리는 엉덩이를 보고 감탄의 탄성을 소리 없이 질렀다.

술잔을 비우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찡긋 웃으며 내게 건배를 했고 나도 웃으며 그에 응했다.


‘승리자라 이건가’ 하는 생각에 비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그는 내가 부러움의 눈빛으로 쳐다본줄 알것이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바를 나섰다. 팁에 만족하는 바텐더와 페로몬 전쟁이 끝난 이 전장에 홀로 남게 되자 쓸쓸함이 덮쳐왔다.


빈병이 하나 둘 늘어가고  바에 기대어 턱을 괸채 온몸으로 취기를 느끼고 있었다.

쥬크박스에서 울려퍼지는 오래된 째즈 는 이제 자장가처럼 나의 몸을 무겁게 하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시계를 보니 새벽이 다되가고 있었다.

테이블에 술값을 올려놓고 비틀비틀 몸의 중심을 가까스로 잡아 걸으며 만취한 손님때문에 한숨만 쉬고 있는 바텐더를 보고 힘없이 손을 흔들고 나왔다.


얼음장 처럼 차가운 새벽의 냉기는 얼얼하게 술에 절여있던 코를 순식간에 얼려놓고 온몸을 타고 내려가 순식간에 몸안의 열기를 내몰았다.

흔들리는 버스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채로 울퉁불퉁한 도로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다보니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팽팽 도는것만 같아 숨을 크게 몰아쉬고 밖을 내다 보았다.

이제 갓 성인이 된것 처럼 보이는 이들이 술집 앞에서 지나는 여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여자들의 화장이 진한걸 보니 밤새도록 놀다가 돌아가는거 같아 보였다. 잠깐의 대화를 끝으로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더니 술집으로 같이 들어간다.

한심스런 얼굴로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서로를 탐하고 돌아다니다 오후 느즈막께에 일어나 술에 쪄든 속을 달래기 위해 보이는것마다 입에 쑤셔넣고 몇달러 되지 않는 시급을 받으며 짜증섞인 얼굴로 서빙을 하고 게걸스런 손님의 비유를 맞추고 자신에게 유독 까탈스럽게 구는 손님의 음식에 몰래 침을 뱉겠지

밤늦게 다시 시작되는 술판에 인생 뭐있냐는 현실에 도움되지 않는 도피적 말만 내뱉고 술과 담배에 쪄들어 이성에 대한 욕망만으로 자신을 채우겠지

그렇게 하루 해가 지나갈수록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걸 느끼고 어느새 파릇파릇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늘어지는 몸과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체력이 버겁다는걸 느낄때쯤 멈추지않을것 같던 지난날과 현실의 괴리감에  아직은 젊다는 자기위안을 위한 술만 더 찾아 가고 인생에 대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행동 하지 않은 지나온 시간이 후회 되겠지 그리고 자기보다 못한이들을 찾으며 어떻게든 자신이 더 잘살고 있음을 증명하려 하고

그리고 ….


버스가 터널에 들어서자 초췌하게 의자에 몸을 걸치고 있는 내가 유리창에 선명히 비춰졌다.

욕을 한번 내뱉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쓸데없는 생각만 많아 지는것같다.


텅빈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서서 어느 노인을 한명 태우고 다시 덜그럭 거리며 달리기 시작한다.

노인은 자리에 앉아 한숨을 몰아쉬고 이른 새벽의 기상으로 아직 잠이 덜가신  피곤한 눈을 잠시 감는다.

얼마나 신고 걸었는지 뒷굽이 닳아 가죽이 드러날꺼 같은 신발과 색이 바래 구멍날것처럼 헤어진 바지가 고단한 그의 삶을 대변하는것 같아 보였다.


이새벽에 일을 나가는걸까 아니면 집에 들어가는걸까 깊게 패인 주름진 얼굴과 검붉은빛 탁한 피부가 왠지 서글퍼 보이기 까지 했다.

무엇이 그를 이 새벽으로 내몰아 세운것일까.


조용한 버스에 벨소리가 울려퍼지고 노인은 자켓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천천히 꺼내 전화를 받았다.

나즈막하고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는걸 듣고 있자니 오늘은 그의 생일인것 같았다. 간단히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 할때 또 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휴대폰에 뜬 발신자를 보고 활짝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그의 자녀인거 같아 보였고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듣는것 같았다. 그의 고단해 보이는 얼굴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전화를 끊고도 두세 통화가 더 왔다. 모두 가족인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때 그는 저녁 몇시에 어디서 모인다는걸 듣고 재차 확인하며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창밖을 둘러보는것 같았다.

처음 봤을때의 고단해보이기만 하던 그는 없고 행복의 삶에 감동을 느끼는 노인만이 남았다.

그는 문득 내 시선을 느꼈는지 눈이 마주치자 살며시 웃으며 멋쩍게 핸드폰을 들어 보이고 주름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한번의 벨소리가 더 들리고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들리는 대화로는 부인과 통화하는것 같았다. 지갑을 챙겼는지 확인하는것 같았고 정성스레 싸준 점심 도시락을 손으로 어루 만지며 무릎위로 올려 놓았다.

그는 행복에 가득찬 눈빛으로 창밖의 설경을 부인에게 얘기했고 부인은 춥지 않겠냐는듯 걱정하는것 같았다.

괜찮다며 부인을 안심시키던 그는 “사랑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생일 이신가보군요”

술이 취해서 인가 좀처럼 타인에게 말거는 법이 없는데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 그렇다네”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오늘 하루 바쁘시겠네요”


“하하.. 그냥 조용히 지내려 했는데 자식녀석들이 가만있지 않는군”

그는 새삼스럽다는 듯 표현했지만 표정에서는 달라보였다.


“너무 행복해 보이시니 부럽습니다”

나의 말에 그는 크게 한번 웃었다.


“그런가”

노인은 다시 차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노인에게 가까운곳으로 가서 앉았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수 있습니까”

나의 말에 노인은 지긋이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새벽까지 어디서 그렇게 술을 마신건가? 파티라도 갔다온건가?”


“그냥  마시는거죠뭐”


“혼자서?”


“아! 혼자는 아니네요 늘 반겨주는 바텐더가 있으니 근데 그친구랑은 한마디도 해본적이 없다니까요 그렇게 자주 다녔는데 도통 말을 거는 법이 없어요 팁을 넉넉히 주지 않아서 그런건가…”

나는 그런 녀석은 처음 이라는듯 힘없이 손을 저었다.


“가족들과 함께 하지 그러나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네?”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나?”


“부모요 하하.. 안계십니다.”

내말에 노인은 아차싶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괜찮습니다. 워낙 일찍 돌아가셔서 기억도 안나니까요”


“그럼 혼자 살고 있나?”


“네 뭐 그렇죠”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내려야 할 정류장이 거의 다와갈때쯤 노인이 입을 열었다.

“가족을 이루게”


“네?”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게 그게 행복해지는 길이야”


“사랑하는 사람이라…. “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영감님 그런사람이 나타난다고 한들 이런… 쓰레기 같은.... 이런...”

나는 내 몸을 두손으로 가리키며 술에 취해 자꾸 비틀어지는 혀로 말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시야는 자꾸 흐려지고 자꾸 울컥 하는 기분이 들어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감싸쥐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 가려 몸을 들썩였다.


“걱정하지말게”

그는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지금 옆에 없다고 좌절하지 말게나 어딘가에서 나처럼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고 있을게야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같이 보내고 자네에게 올걸세 아니면 좀더 후에 올수도 있지 어쩌면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마주칠수도 있고 신호를 기다리다가 인사 할수도 있네 조급해 하지말게나. 아마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을걸세 자네가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버릴 아름다운 매력으로 자네보다 더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을걸세”


“그런게 어디있습니까”

나는 비틀어지는 발음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보게 지금까지의 자네에게 무슨일이 있었던지 어떤 장벽을 넘어왔던지 여기까지 왔다는건 앞으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걸세”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괜찮네 의심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겠지 괜찮네 하지만 그 누군가는 자넬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 자네도 찾아나서야 하지 않겠나”

노인의 눈빛에서 진심으로 나를 걱정한다는 것을 느끼자 가슴이 뜨거워져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것만 같았다.

심호흡을 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안절 부절한 몸짓으로 입을 열었다.


“사모님과 만났을때 그런  사람이다 라는게 보였나요?”

나의 말에 노인은 크게 웃었다.


“그때가 되면 알수 있네 보자마자 알수 있지”

그의 말이 너무 허무맹랑하게 돌아가는것 같아 그만 두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려야할 정류장이 다가와 일어섰을때 노인은 내게 다시 말을걸었다.

“자네 크리스마스때 별일이 없다면 우리집에 한번 와볼텐가?”


“네?”

노인의 뜬금없는말에 놀란눈으로 쳐다보았다.


“하하 놀라지 말게나  이상한 악취미나 살인마는 아니니까 그저… 자네 몰골을 보니 술만마시고 끼니를 거르는것보다 우리집에와서 좀 짜지만 마누라가 만드는 스프에 칠면조 한조각 먹는게 나을것 같아서 그러니까”


“아.. 호의 감사드립니다 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수첩을 찢어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 내게 건넸다.


“우리집 식구들이 좀 많아 자네 한명 낀다한들 별게 있겠나 같이 와서 한잔하게나”


“감사합니다...선생님 성함이..”


“바비라고 들 부르지”


버스 문이 열렸다.

나는 더 대화할 시간이 없이 계단을 내려가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도 버스가 완전히 길 모퉁이를 돌때까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집으로 들어와 신발 뒷꿉을 구겨 벗기며 옷을 하나둘씩 벗어 던졌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후 침대에 들어 가 이불을 덮자 온몸을 짜릿짜릿하게 하는 냉기로 새우처럼 몸을 굽혔다. 노인의 말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2 -






365일 들어도 적응 되지 않는 알람소리와 함께 시계를 부실듯이 주먹으로 내리 눌렀다.

머리속을 후벼파는 두통이 신음소리를 토하게 하고 좀처럼 일어날수가 없었다.

망할놈의 수면제는 뭔가 다른게 들어가 있는건가 깨어날때마다 누군가 뇌를 양손으로 감싸쥐고 빨래짜듯 쥐어 짜내는것 같았다.

가까스로 일어나 커텐을 걷어재껴보니 날이 밝았지만 구름이 짙게 두른 하늘에 햇빛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었다.


온기 없는 싸늘한 거실을 살얼음판을 걷는 고양이처럼 발가락을 웅크리고 종종 걸음으로 거실로 나왔다.

머리를 감싸쥐고 고통에 신음하며 물병을 입에 들이붓다가 강하게 퍼지는 알콜 냄새에 싱크대에 그대로 토해버렸다. 언젠가  술을 따라 마시기 위해 컵을 찾다가 그냥 물병에 따라서 병채 들이킨게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쌓여있는 설겆이와 나뒹구는 술병을 보며 짜증이 폭발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언제 샀는지도 기억도 나지않는  낡은 자켓을 걸쳐입고 현관옆에 널부러져있는 목도리를 짚어들어 휘감으려다 불쾌한 냄새가 진동하는 바람에 던져버렸다.

잔뜩세운 깃에 얼굴을 박고 집을 나서니 심장까지 얼려버릴 칼바람에 두통때문에 머리가 아픈건지 추위에 머리가 아픈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힘없이 쓰러질 것 처럼 지친얼굴의 사람들이 정류장에 무표정하게 서있었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차를 타는 사람들. 이젠 저사람이 무슨 옷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알수 있을것 같이 익숙한 얼굴들이지만 말한마디 걸어본적은 없었다.

각자의 영역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서성이다 주머니속에 차갑게 식어버린 핸드폰이 만져졌다.


부재중 통화 10통

문자메시지 20통

내역을 확인해볼까 망설이는 순간 차가운 바람과 함께 버스가 큰숨을 내쉬듯 멈춰 섰다.


차창밖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을때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져 이내 강한 바람과 함께 흩날리는게 보였다.

문득 의자 밑을 쳐다보며 낡은 운동화를 신고온 것이 후회 됐다.

쌓이는 눈인가…. 분명 질척거릴것인데 퇴근 할때쯤이면 분명 진흙투성이가 될것이 뻔했다.

겨울이니 이참에 부츠를 하나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아가씨가  어울린다며 일방적으로 놓고간 것인데 궂이 이걸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구나 하는 생각에 집에 갈 때 정류장앞에 구경만 했던 신발가게에 들리기로 했다. 밑창이 튼튼하고 눈을 밟아도 미끄러지지 않을 코만도솔로 사야지 하고 생각했다. 가죽은 곱게 광내있는것보다 오일을 먹이고 거칠게 신어도 멋이 날만한 걸로 사는게 낫겠지 했고 색깔은 어두운 버건디 색이 좋겠다 싶었다.

나는 이미 멋들어진 부츠를 신고 알수 없는 자신감에 취해 클럽에서 혼자 앉아있는 아가씨에게 멋쩍은 멘트를 건네고 술을 마시고 집에 데려다 주는길에 키스를 하는 달콤한 상상에 빠져 있었다.


회사 입구에 도착해서 유리창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고 면도하지 않는 수염을 한번 쓸어내렸다. 정신없이 나오는 바람에 신경쓰지 못한게 거슬렸다.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좋은 아침~”

경쾌한 인사와 함께 동료들과 웃으며 인사했다.

모두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 좀처럼 자리에 앉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뭘 했길래 전화도 안받는거야”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와 돌아보니 탕비실 입구에 기대어 커피를 휘젓고 있는 데니얼이 보였다. 녀석은 입사할때부터 쭉 같은 파트에서 일하고 점심을 먹었던 사이였고 사무실 내에서 인기있는 녀석이었다.

늘 미소띄운 잘생긴 얼굴과 사람들과 얘기할때면 좀처럼 끊기지 않는 가쉽거리와 유머러스함을 볼때면 이런 녀석은 어디에서 튀어나온건가 싶기도 했다.

가끔 파트 인원들과 같이 술을 마실때면 늘 중앙에 앉아 기차화통을 삶아먹은것 같은 큰목소리로 건배를 외치고 아일리쉬 놈 답게 술을 말째로 들이킨다. 작년쯤 부터 인사파트의 단정한 아가씨 페기와 붙어다니는것 같더니 여름에 같이 휴가를 떠나자고 권해왔지만 거절했었다. 나중에 들은 일이지만 페기가 친구를 데려와 짝짝이 여행을 떠나는게 어떻겠냐고 먼저 제의 해왔다고 했다. 그 친구에게 어찌나 나에 대해 미화 시켜놨던지 갈생각도 없었지만 혹여나 간다고 해서 마주쳤으면 큰 실망을 안겨줄뻔했다. 결국에 내가 가지 않는 바람에 둘이 여행을 떠났고 지금은 사내에서 모두가 아는 커플이 되었다. 이미 내년쯤 결혼 할꺼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데니얼은 늘 내게 들러리라던지 결혼식이라던지 시시콜콜 얘기했지만 난 대답만 하고 지나쳐버렸다.

예전엔 몇번 어울려 다녔지만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다 생각해서 식사나 몇번하고 사무실에서 시시콜콜한 잡담이나 하며 친구라는 타이틀을 걸어두기 위해 만든 관계로 두었다.  둘이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몇달전에 파트를 옮기게된 데니얼은 항상 그걸 신경쓰고 있는듯 했지만 난 오히려 더 편하다고 느껴졌다.


“여자?”

데니얼은 익살스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뭐?”

나는 무슨 의미냐는듯 무표정으로 그의 커피를 뺏아 한모금 마셨다.


“전화도 안받고 도대체 뭐하고 다니는거야”


“아~ 전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커피만 홀짝였다.


“21세기 히피족이야”

약간 높은 톤의 목소리가 돌아보지 않아도 페기인것을 알아차렸다.


“안녕 페기”

나는 뒤로 손을 뻗은채 인사했다.


“맨발로 산에 오른다거나 텐트치고 대마초나 말아피우면서”

페기가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하며 내게 다가왔다.


“추워 죽겠는데 맨발로 산에 오르기는”

시큰둥하며 커피를 마시는 나를 데니얼이 빤히 쳐다보더니 심각하게 물었다.

“너 어디 아픈거 아니지?”


“뭐?”


“완전 맛이 간거 같은데?”

그는 손가락으로 얼굴을 크게 빙빙 돌리며 가리켰다.


“쓸데없는 소리는”


“킁킁”

심각한 얼굴로 서있던 데니얼은 갑작스레 소리를 내며 내 어깨의 냄새를 맡았다.


“뭐야?”


“너.. 마약 하는거냐?”

그가 한쪽눈을 찡그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좌우를 살피고 귓속말을 하듯이 손을 가리며 말했다.

“엉덩이에 쑤셔 넣는 죽이는거 있는데 하나줘?”


“꺼져”

페기가 더럽다는듯이 나를 때리고 나와 데니얼은 미친듯이 낄낄거렸다.


“아 맞다 저녁에 전화 꼭 받아라”

데니얼이 페기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뒤로 걸어가며 말했다.


“뭐?”

내가 묻자 데니얼은 양손을 들어보이며 왜 되묻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됐다는듯 고개를 흔들고 손을 저었다.


“이브라고 이~~~브 찾아간다 ”

데니얼은 페기에게 끌려가는 동안에 계속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의자에 앉아 한숨을 몰아쉬고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크리스마스 이브라니..”

별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고 뭔가 다른걸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당장 이 갑갑한 곳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퇴근시간이 되고 정각에 쏜살같이 회사를 나왔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데니얼과 페기가 찾아올것이 뻔했다.


예상대로 거리는 하루종일 간간히 내린 눈으로 질척거렸고 이 낡은 운동화는 100미터도 견디지 못하고 진흙에 젖어버렸다.


“지랄맞구만”

의미없는 혼잣말과 함께 횡단보도 옆에 덩그러니 놓인 쓰레기통을 보고 욕을 했다.


부츠를 사면서 양말도 한켤레 얻어야 겠다 싶었다. 운동화고 양말이고 이제는 그저 눈에 쪄들어 걸을때마다 물이 베어 나오는 것 같았다.

발가락 사이로 펌프처럼 들락날락 거리는 구정물이 당장이라도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같은 날씨에 맨발로 걷는다면 5분도 지나지 않아 동상에 걸릴것이 뻔했다.

두발 모두 동상에 걸려서 붕대에 칭칭 감긴채 병원에 누워있는게 상상이 되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하루종일 하얀색 천장만 보며 누워있으면 왠지 옆 침대에는 유리창을 긁는듯한 마름 기침소리의 환가가 누워있고 포르노에서나 보던 섹시한 간호사대신 지랄맞은 환자에 이골이 났다는듯한 표정의 무뚝뚝한 간호사가 소변을 받으러 올것만 같았다.


망상에 휩싸이며 얼어털질거 같은 발을 이끌고  어느새 신발가게에 도착했으나 나는 문을 걷어찰수 밖에 없었다.


‘금일휴업’

주인장이 급하게 휘갈긴 듯한 글씨는 아무종이나 찢어 붙인듯 했다.


“젠장할… 제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구만 지랄맞은...”

진흙과 구정물에 쩔어버린 운동화를 신고 집에까지 가야 한다니 하늘을 올려다 보고 욕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기분을 전환 하지 않으면 폭발해버릴 것 같아 안절부절 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깊숙이 연기를 들이마시고 뱉으며 주머니속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부재중 통화 20통 내역을 확인하지 않고 넘겨버렸다.


전화번호부를 뒤지다 얼마전에 꽤 괜찮았다 생각했던 여자의 연락처에서 통화를 눌렀지만 전화를 받지않아 끊어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전화번호부를 뒤지고 여자들에게 전화했지만 당장에 만날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멍하니 서있다 유리창에 비친 내모습을 보고 담배를 하나 더 꺼내물었다.

탄력있고 잡티하나 없던 피부가 어느새 주름이 하나둘씩 지나가고 맑고 총명했던 눈동자가 술과 담배에 찌들어 흐리흐리 해진 것이 보였다.

어느새 이렇게 되었을까 싶다가 아직 단단한 어깨와 탄탄한 가슴이 남아 있다고 나를 위안하며 한껏 허리를 치켜세웠다.

남들에게도 특히 여자들에게 이 모습이 보여질지 의문이 들었다. 술에 취하지 않고 총명한 눈빛과 맑은 피부를 가진 아가씨라면 분명히 알아볼수 있겠지 하며 다가올지 모를 낯선이를 상상했다.


햇빛이 따사롭게 들어오는 카페에 앉아 윤기나는 머릿결은 약간 어두운 갈색으로 어깨죽지 까지 늘어트려있고 하얀색 블라우스에 빨간 가디건을 걸친채 책을 읽는 여자가 떠올랐다. 연한 화장은 단아함이 돋보이고 조심스런 몸짓엔 우아함이 보이는것만 같다.

슬며시 다가갔을때 나를 보며 인사하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스하게 귀에 들어오고 책을 덮으며 짓는 미소가  몹시 사랑스러워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음에도 키스를 아끼지 않을거 같다.

나란히 옆에 앉아 하루 일에 대해 조곤 조곤 얘기를 나누며 장래 함께 할 공간에 대해 얘기 하면 품에 파고들어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를 내고 사랑을 속삭이고 주말이면 그녀의 가족들을 찾아가 같이 식사를 하고 축하를 나누는 상상에 빠져들어 담배가 다 타면서 손가락을 댈뻔했다.

재빨리 비벼끄고 다시 유리창을 보니지저분한 코트를 입고 나온것이 후회됐다.

차라리 엊그제 입은 감색코트를 입고 나왔어야 했다. 머리를 정갈하게 넘겼어야 했고 셔츠를 다려 입었어야 했다.


오늘은 날이 아닐수 있을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대로 집에 가면 하루가 너무 비참할거 같아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예상이 맞았던건가. 뭔가를 한것도 없이 시간만 보내다 결국 늘 가던 바로 돌아왔다.

자정이 되지 않은 시간이다 보니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구석진곳에 앉아 바텐더에게 눈인사를 하자 그는 이제 내가 주문을 하지 않아도 맥주를 갔다주었다.

멍하니 앉아 정신을 놓은채로 허공만 살피던 때에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한 남자가 술집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게 보였다.

어디서봤던가 한참을 기억을 되새겨봐도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주시한채로 맥주를 연신 들이켰다.


딸랑 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자욱한 담배연기 사이로 혼자 들어서는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나와 가까운 자리에 천천히 코트를 벗어 올려놓고는 의자에 앉아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했고 주위를 둘러보며 시계만 쳐다보는걸 보니 뭔가 혼자의 어색함을 지우려는것 처럼 보였다.

옷차림을이 남자를 기다리는것 같진 않고 바의 어두운 조명속에서도 수수하면서 단정해보이는 실루엣이 나쁘진 않는거 같았다.

단순히 술을 마시러 온걸까 뭘 하러 왔을까 누군가를 기다리러 온건가. 턱을 괴고 쳐다보다 보니 구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서서 옷매무새를 정리 하는것이 보였다.


“어이고…. 어?”

순간 그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분명 엊그제 여기 이곳에서 새벽에 여자와 얘기를 나누고 데리고 나가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은 녀석이었다.

말끔한 슈트의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를 정리한 그는 여자에게서 몇걸음 안되는 곳에 앉아 바텐더를 불러 지페를 손에 쥐어주었다. 바텐더는 익숙하다는 듯이 지페를 주머니에 꾸겨 놓고 칵테일을 여자에게 건내주며 남자를 가리켰다.

여자는 황당하다는 듯이 남자의 미소를 보고 잔을 옆으로 밀어놓고 시선을 회피해버렸다. 그때부터 난 웃음이 터져나오는걸 억지로 참고 있다가 남자가 승부수라는듯 여자에게 다가왔을때  벌떡 일어나서 옆자리로 옮기는 그녀를  보고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남자의 쓴웃음 짓는 귀환 길을 보며 맥주가 코로 넘어갈뻔해서 기침을 하면서도 계속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뭐가 웃기죠?”

여자가 물었다.


“네?”

나는 숨을 가다듬고 그녀를 바라 보며 말했다.


그녀는 뭔가 한심하다는듯 고개를 절래 흔들고는 술잔을 들이켰다.

나는 그녀를 비웃었다는 느낌을 준건가 하며 고민하다 입을열었다.

“혹시 기분 나빳다면 미안합니다. 실은 방금 온 그 남자가 엊그제 여기서 본 사람이거든요”

나는 그말을 하면서도 입이 실룩 실룩 거리며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본사람 이라구요?”


“네 엊그제도 똑같은 짓을 하더군요”


“아.. 그래요?”


“오늘은 그의 날이 아닌가 보네요”

나는 웃으며 멀리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다른곳에 찝쩍이다 또 다시 실패했는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왜 그럴까요?”


“네?”


“왜 저런 소모적인 일을 할까요?”

그녀의 말투가 사뭇 진지한 바람에 나는 웃음기를 거두었다.

“항상 여자는 혼자 앉아있으면 이런식으로 접근하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녀는 술잔에 남은 술을 한꺼번에 입에 털어넣고 미간을 찌부렸다.


“글쎄요..”


“당신은 그렇지 않나요?”


“네?”

나는 무슨얘기냐는듯 물었다.


“당신은 다른가요?”


“글쎄요 갑자기 물어보니 당황스럽네요”


“그냥…. 내버려 둘순 없는건가…”

여자는 술을 한잔 더 시키며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채로 있었다.


“외로워서 이지 않을까요”


“외롭다구요? 외롭다면 사람을 만나면 되잖아요”


“이렇게 만나는거죠”


“이런식으로 만나는게 오래지속 되는 관계인가요?”


“그건..”


“술이나 한잔 마시고 가식적인 대화를 나누고 같이 나가서 서로를 탐하다가 아침이 되면 모르는 사람처럼 헤어지는게 오래지속 되고 외로움을 지울수 있는 관계인가요?”

다그치듯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쥬크박스의 노래가 바뀌고 바텐더가 새로운 술잔을 그녀 앞에 놓았다.


“미안해요..”

그녀는 자신이 너무 했다 생각했는지 사과를 했다.


“아닙니다.”

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제니 라고해요”

그녀는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데니얼 입니다.”

잠시 그녀를 쳐다 보다 그녀가 가볍게 흔드는 손에 악수를 하고 다시 정적이 흘렀다.


“무슨 얘기를 하는걸까요?”

그녀는 퇴짜놓은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끊임없이 구애하다 이제야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를 만난것 같았다.

가슴을 잔뜩 부풀리고 깊게 파진 드레스를 입은  빨간머리 여자의 옆에 앉아있었다.


“그냥 가쉽거리겠지요”


“신기하네요”


“신기할게 있나요 사람은 술을 마시면 수다쟁이가 되는걸”


“하하”

그녀는 살짝 웃어보이며 그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궁금한가요?”


“네?”


“무슨얘기를 하는지?”


“글쎄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자 잘봐요”

나도 모르게 맥주병을 들고 그녀의 옆자리에 가서 앉으며 말했다.

“순간을 놓치면 안되요 저 빨간머리 앤이 잠시 한눈판사이에 녀석은 번개같이 바텐더에게 돈을 쥐어줄거예요”


“에? 뭐라구요? 하하”

그녀는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말도 안된다는듯이 물었다.


“쉿 한눈 팔면 안되요 빨간머리 잔이 비었어요”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 빨간머리의 여자는 자신의 옆자리에 가방에서 뭔가를 찾는듯했고 순간적으로 남자는 빠텐더에게 지폐를 쥐어주었다. 그 행동이 얼마나 빠른지 눈을 조금이라도 늦게 깜빡였다면 못봤을것이다.


“맙소사”

내 옆에 앉은 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는 그 광경에 몹시 놀라 기가차다는듯 웃었다.

“뭐 하는거죠?”


“바텐더는 술을 좀더 독하게 타 줄거예요”


“그러면..?”


“그럼 취하는거죠”


“와우..”


“이제 좀있으면 서로의 스킨쉽이 진해질거예요”

우리는 마치 흥미로운 스포츠 경기를 구경하듯 술을 연신 홀짝거리며 그 광경을 지켜봤고 한치의 오차 없이 짠 작전대로  행동하는 선수들의 플레이가 펼쳐졌다.


“이런 여자가 일어나네요”

그녀는 게임이 끝났다는듯이 체념하듯 말했다.


“화장실 가는거요”


“네?”


“남자가 계산을 끝낼 시간을 주는거죠 저봐요 술값을 계산하네요”


“그럼 어떻게 되는거죠?”


“나가는거죠 뭐”

나는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그녀는 두 선수가 경기장에서 퇴장하는 모습까지 바라본후 나를 보고 말도 안된다는 표정과 함께 술을 털어마셨다.


“자 어떻게 모든걸 알고 있죠?”

나를 쳐다보며 익살스런 미소를 보이는 그녀가 술이 좀 들어가서 그런지 그 모습이 사뭇 귀여워 보였다.


“흠흠… 글쎄요.. 여기는 내가 자주오는 바이고 올때마다 저 녀석은 항상 같은 수법을 쓰죠”


“경험이 아니구요?”


“경험?”


“저 플레이보이와 같은 수법을 썼던 경험이요”


“하… 내가 저 허여멀그레한 놈과 같이 보이요?”

나는 기가 차다는듯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닌가요?”


“이봐요 내가 설사 그런 경험을 가지고 스킬로 무장하고 있다면 왜 당신한테 일일히 설명하는걸까요?”


“다른 방법인가보죠”


“다른방법?”


“자신은 같지 않다는걸 빙자한”


“이야.. 배배꼬이셨구만”


“들킨건가요?”


“맘대로 생각하시오”

나는 바텐더에게 맥주를 더달라고 외쳤다.


“내가 매력적이지 않나요?”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에 무슨 의미인가 싶어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나한테 매력적일 필요는 없지”

담배를 비벼끄며 말했다.


“무슨말이죠?”


“아무 의미 없수다”

바텐더가 새로 내놓은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말해봐요 어떤 매력을 찾는건가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매력이라.. 굳이 찾자면 그냥 남들과 똑같지 착하고 예쁘고 현명하고”


“진짜 그게 다 인가요?”


“그거 말고 더 바라는게 이상하지 않을까요?”


“남자들은 항상 그 이상을 원하죠”


“사실 그런건 다 필요없지”


“그럼 뭐가 필요하죠?”


“느낌 그것만 있으면 되는거야”


“당신이?”


“뭐가 더 필요하겠소 인생은 짧고 함께 있을때 즐겁다면 그게 다 이지 않을까 많은걸 생각하면 머리 아프다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투가 점점 슬퍼지는것을 느꼈다.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쥬크박스에 흘러나오는 한물간 캐롤을 듣고 있었다.


“자 말해보시오 여기 온 이유가 뭡니까?”


“네?”


“누군가를 기다리는것 같지도 않고 누구를 원하지도 않는거 같은데 이런데 까지 와서 혼자 술마시는 이유는 뭡니까?”


“그냥.. 그냥 술이 마시고 싶어서요”


“그럼 친구들이랑 마시면 되지 않소 동네 가까운곳도 있을텐데 여기 주변에 사나요?”


“아니요 그냥..”


“희한하군”


“그냥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있고 싶은데 혼자 있는건 싫어서요”


“무슨말인지 모르겠군요”


“그런거 느낀적 없나요? 나를 너무 잘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던 무슨말 한마디를 하던 나에대해서 너무 잘알고 있기 때문에 철저히 속이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게 있을수 없다는거…”


“복잡하군”


“이해가 안되는군요?”


“그래서 아무도 당신을 모를것 같은 이곳에 왔다?”


“뭐 그런거 같네요”


“내가 말해주지 뭔가를 하고 싶은데 당신이 속해있는곳에서 그 뭔가를 자유롭게 하자니 사람들 눈치를 보는거지 그래서 당신을 모르는 곳에 와서 하고 싶은대로 하고 다시 그 속했던 공간으로 돌아가는거야 맞지않나?”


“일탈이라는 건가요?”


“아… 그렇군 일탈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내가 너무 길게 말해버렸군”


“그런가요 그런데 나는 살면서 그런걸 바란적은 없어요”


“일탈이라는게 거창한게 없소 그냥 이렇게 전혀 갈일도 없고 가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곳에 와서 이렇게 술마시는게 일탈일수도 있고 매일같이 출근하기 위해 자정 전에 집에가서 몸을 뉘우는 대신 갑작스레 밤늦게 돌아다니는것도 일탈이오 나쁜게 아니니까 걱정마시오 살아가는데 활력소가 되기도 하니까”


“하긴 내가 이렇게 여기 앉아서 당신과 말하고 술마시는게 예상밖이긴 하네요”


우리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가고 술을 마셨다.

내앞에 맥주병이 쌓여갈수록 그녀의 위스키잔이 많아졌다. 도수가 높은지라 나보다 훨씬 먼저 취기가 도는거 같아보였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것에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이따금씩 내 허벅지를 쓰다듬기도 하고 팔뚝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자 이제 어떤걸 해볼까요?”


“글쎄 바카디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건 어떨까요?”


“아~ 그러기엔 너무 많이 마셨어요”


“하긴 우리 좀 과하게 먹은거 같군”

나는 앞에 쌓은 술잔과 술병을 가리키며 실없이 웃었다.


“춤출래요?”

그녀가 신난다는듯 말했다.


“뭐라구요?”


“춤 추자구요”


“여기서?”


“안될거 있나요?”


“하… 하하하”

나는 황당하다는듯 둘러보았다. 바에는 아직 사람들이 많았고 쥬크박스에서 나오는 음악은 춤추기에는 너무 조용한 리듬이었다.  아무리 취한다지만 여기서 춤을 출수 있을거 같진 않았다.


“이건 일탈이 아닌가보네요”

그녀는 김이 샜다는듯 입술을 쌜죽거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나갑시다”


“네?”


“나가자구요”


“어딜요?”


“춤추자고 했지 않소 여긴 춤추기 좀 그러니 나갑시다”


나는 다짜고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우리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미친듯이 말도 안되는 스텝을 밟으며 깔깔웃어댔다.

몇몇 사람들은 우리를 따라 추기도 하고 환호를 지르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춤추며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한가로이 놓여있는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겨울인데도 너무 움직인 탓인가 아니면 술때문인가 좀처럼 춥지가 않았다.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올때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자 그녀는 잽싸게 뺏아 입에 물고 연기를 길게 뿜었다. 찌부리는 미간과 콜록거리는걸 보니 원래 담배를 피는거 같지는 않아 다시 뺏으려 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한대를 다 피웠다.


“최고의 일탈이 뭐였나요?”


“나 말인가요?”

내가 묻자 그녀는 담배를 비벼끄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로마… 로마에 갔었던게 제일 큰 일탈인거 같네요”


“로마요?”


“네 그때 갑작스레 떠난거였는데 문제는 난 아무것도 모르고 가서 하하”


“와우..”

그녀는 갑자기 나를 경이롭다는듯 쳐다보았다.


“왜요?”


“정말 가보고 싶었어요 로마…”


“그런가요?”


“어때요? 아니 어땟나요?”

그녀의 눈이 호기심에 반짝이며 얼굴이 가까워졌다.


“뭐… 그저.. 그런”

나는 말을 흐렸다. 사실 로마에 가봤다는건 거짓말이었다. 로마에 대해 아는것은 잠이 도통오지 않는 새벽 다큐채널을 틀어놓고 멍하니 보고있던게 다였다.


“부러워요.. 그런데도 가보고”


“떠나면 되잖아요”


“그렇게 쉬운게 아니예요”


“하긴..”

나는 담배를 다시 꺼내 물고 연기를 내뿜었다.


“떠나고 싶네요”

그녀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눈만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담배연기만 내뿜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흔들거리는 시선에 빨간 네온사인으로 번쩍이는 로마 라는 싸구려 호텔이 보였다.


“내가 아는 로마가 있는데 같이 갈까요?”


우리는 깔깔거리며 호텔 로비로 걸어갔다.

로마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로비한 가운데에 트레비 분수가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었고 아리보리색 벽면엔 조잡하게 조각이 붙어 있었다.

내가 키를 받는 동안 그녀는 두어걸음 떨어져서 서있다가 핸드백을 열어 화장품을 꺼냈다.

그순간 ‘땡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핸드백에서 작고 빛나는 것이 떨어져 굴러갔다. 그녀는 황급히 그것을 집어 넣었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차릴수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온몸을 휘감고 있던 취기가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것 같다.

키를 받고나서 벨보이의 안내를 따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황금색 휘황찬한하게 빛나는 엘리베이터의 문에 비친 여자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주위를 둘러보고 초조한듯 서있었다.


문이 열리고 벨보이와 여자가 먼저 탔을때 나는 머뭇거렸다.

그녀가 뭐하냐는듯 나를 쳐다보았다.


“미안합니다.”

나는 짧은 말과 함께 뒤돌아 호텔을 나왔다.


“어디 가는거예요”

그녀가 등뒤에서 소리쳤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코트 깃을 세워 얼굴을 파묻었다,


“데니얼!!”

그녀가 소리쳤다.

나는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더욱 몸을 웅크렸다.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얼굴을 들지 않았으나 그녀의 표정이 상상돼었다.


“다른사람인척 하지마 너도 똑같은 놈일 뿐이야 위선적이고 역겹지 항상 이런식이야 바라는거 없다고 쿨한척 다가와서 알고나면 질색하지 쓰레기 같은 새끼”

그녀는 당장이라도 후려칠듯한 기세로 말했다.


“일탈은 무슨 넌 이게 너야 이게 너 사는 방식이야 퉤”

그녀는 내게 침을 뱉고 성큼 성큼 지나 걸어갔다.


눈발은 점점 거세졌고 한동안 멀뚱이 서있는 내 어깨위로 쌓였다.


정처없이 걷는길에 간간히 들리는 캐롤이 거슬렸다. 이유없이 그저 웃고 떠는 목소리들이 싫었다.

담배를 꺼내물다가 주머니속에 구겨져있는 이어폰이 만져졌다. 그래 차라리 막아버리자는 생각으로 귀에 쑤셔넣고
아무 노래나 틀어버렸다. 까마득히 오래된 날에 길거리를 거닐다 우연히 음반가게 앞에 놓인 티비로 넋놓고 보았던 diego el cigala의 garganta con arena가 들려왔다. 

그때는 어렸었다. 소리치며 몰려다니기를 좋아했고 수위를 알수 없는 바다에 다이빙 하고, 처음보는것과 신기해보이는것에 도전했었다. 음정과 박자도 맞지 않지만 음악에 취해 노래 부르고 되지도 않는 몸을 흔들거리며 춤을 췄었다. 언제부터 그런것들을 그만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때 가슴을 후벼파는 그런게 있었다. 비어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온통 메워 버리고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 느낌은 수염이 나기직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30킬로를 걸어가 바다를 처음 봤을때 처럼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그런 감정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었다. 그후로 나는 어른이 되서 돈을 벌면 꼭 스페인으로 떠나겠다고 다짐 했었다. 빛바랜 가방을 매고 붉은색 스카프에 청바지를 입고 바람처럼 떠도는 영화속 청춘 처럼 그렇게 떠날것이라고 했다.

그땐 그렇게 어렸었다.


눈에 흠뻑젖은채로 문을 열자마자 정적의 싸늘함과 텅빈 공간의 황량함이 엄습하고 현관문에 있는 자동불만 깜빡였다.
나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신발을 벗는것도 버거워 넘어질뻔한 몸을 겨우 가누고 벽에 기대었다.
거울속엔 헝클어진 머리에 눈밑에 검게 그리워진 수면부족의 징후와 듬성듬성 나있는 수염이 흉물스러워 졌다.

비틀거리며 들어와서 코트를 벗어던지고 식탁에 잠시 기대어 어지로운 시야를 애써 잡아보았다.

아무리 애써봐도 머리속은 계속 흔들리고 이대로가면 분명히 토할거 같아 얼른 잠이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코트를 집어들고 수면제를 꺼내 몇알 입에 털어넣고 수도꼭지에 입을 갖다댄채 물과 함께 넘겼다.

더 움직일 힘이 없었다. 위태로운 몸짓으로 침대를 향해 걸어가다 넘어지고 말았다.

아픔을 느끼는것조차 늦게 오는것 같다. 완전히 뻗어버린채 마루바닥이 내몸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 3 -




나는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따스한 느낌이 발끝부터 올라와서는 가슴께로 왔을때 눈을 가슴츠레 뜨며 깜빡였다.

희미한 안개가 눈앞에 자욱히 낀듯했고 내가 걸어가는 건지 있는지 안개를 손으로 걷고 있는지 모르는채 
흐리한 시야를 조절하며 초점을 맞출때쯤 커다란 서핑 보드에 캘리포니아 라고 써있는것이 보였다.
서핑을 해본적은 없지만 머리쪽이 갈라져 있는걸 보니 기능을 상실한지는 꽤 됐을것 같았다.

그렇게 그 서핑보드가 눈에 익어갈때쯤 주위를 둘어보았다.
나는 대나무로 얽여진 창문 같지 않은 창문(유리창이 없었기때문에 창문이라고 불리기엔 쓰임새가 없었다)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측면으로 받고 있었다.
한쪽 눈이 약간 부시기는 했지만 거슬리지 않았고 따뜻하면서도 
솔솔 부는 바람이 내 옷을 살짝 건드리면서 지나갈 때 나는 비로소 커다란 파인애플이 그려져 있는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닷모양이 허벅지에 멋스럽게 수놓여진 비치팬츠를 입고 있다는것을 알았다.

옷을 보고 이 우스꽝 스러운 꿈에 웃음이 터져나왔고 흥미롭게 시선을 옮겨 보았다.
나는 이제 갓 녹색빛을 잃은 야자수 잎으로 단단하게 엮어진 의자를 낡은 회색벽에 붙여놓고 앉아 있었다.

칠이 다 벗겨진 작은 테이블위에 석류 하나가 입을 쩍벌린채 알알이 튀어나올듯 놓여있고  내손에는 버드와이저 한병이 반쯤 남겨친채 들려있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이꿈이 어떤 시나리오로 나올지 궁금해졌고 해변에 있을법한 조그만 칵테일바 라는걸 감지했을때 뭔가 모르게 편안해 졌다. 
다섯발자국 안되는 거리쯤에 플라스틱 으로 모양을 흉내낸듯한 야자수 잎으로 엮어진 바 뒤편에는 각종 술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양쪽으로 넓직한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햇빛이 바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평화로웠고  느긋하고 따뜻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고 잠에서 몸이 완전히 깨어난 것처럼 상쾌해졌을때 귀를 기울여 보니 사람들이 밖에서 왁자지껄 하는소리가 들리고 파도소리도 들려왔다.

손에 잡혀 있는 버드와이저 한병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숨에 들이키니 너무나 시원해서 뒷머리가 깨지는듯했다.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앉아 눈을 감자 바닷가의 특유의 짠내음이 코를 훑고 지나갔다.

이보다 완벽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다시 헛웃음이 나왔다.

그토록 원하던 시간이 꿈에서나 찾게 되다니 허망하기도 하고 새삼 한번 떠나지 못해 현실에 붙잡아뒀던 육신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파도소리가 울려퍼지는 이 파라다이스 같은 공간에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듯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눈을 슬며시 뜨고 보이는 나무판으로 엮어진 바닥에 긴머리칼에 나풀거리는 드레스가 파도처럼 울렁이는 그림자가 생겼다.

바안에 나밖에 없는걸 알고 있었지만 나를 부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가 바 안으로 들어왔을때 그녀는 구석에 앉아있는 나를 의식하지 못한듯 했고 그녀의 뒷모습을 볼수 있었다.

바람이 내쪽으로 살랑거리며 불어왔을때 맑은 꽃내음 같은 그녀의 체취또한 바람에 실려왔고 이루말할수 없는 그 향기가 내 코를 감동시키면서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넋을 놓은 듯 쳐다보았다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은 마치 금빛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허리까지 늘어트려 있었고 새하얀 만년설 처럼 투명한 피부는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그녀의 외모를 빛나게 했던것은 보고있으면서도 믿을수 없이 빛나는 눈망울 이었다.

 

나를 돌아보았을때의 그 미소는 태어나서 본적이 없었던 황홀함을 느끼게 하고 가슴을 두들겼다.

 

그녀는 아무말없이 미소만 지은채로 나를 바라보다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붉어진 볼 안으로 혀를 굴리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고는양손을 공손히 바 왼편에 있는 입구를 가리켰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의 미소에 취해 손에 들고 있던 맥주병을 낡은 테이블 위에 놓고 천천히 일어서서 몽유병 환자처럼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고 그 백만불짜리 미소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못했다. 

 

내가 입구를 등지고 섰을때 그녀는 내 등을 두손으로 힘껏 떠밀었고 나는 두어걸음 딛으며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스며드는걸 느끼고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발밑을 보니 크림색 모래가 보드랍게 내 발가락을 감싸고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발가락을 움직이고 발바닥으로 모래를 쓸어보았을때 모래의 감촉은 그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가 발가락 사이사이 미세하게 느껴지면서 너무나 현실적이었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 감촉을 몸속으로 깊이 느끼며 이 현상에 대해 그녀에게 물어보려 고개를 돌리려 했을때 갑자기 "와~" 하는 소리와 함께 물구덩이 치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고 나는 차가운 물 한드럼이 뒤집어 씌여져 걸래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머리카락을 타고 내리는 물줄기 사이 시야는 가물가물 해져보이지 않지만  몇몇 사람들이 익살스럽게 웃는 모습이 보였고 금발의 그녀가 활짝 웃으며 흠뻑 젖은 내게 안겨서 깔깔거리며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이게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이미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향기에 취해 있었다.

 

흠뻑 뒤집어쓴 물이 다 떨어질 때쯤 그녀는 베시시 웃으며 입술을 들이 받다 싶이 키스를 했고 약간의 데낄라 맛과 레몬 맛이 베어 있는 채로 그녀는 도망치듯 멀리 뛰어갔다.

 

"에이미!"
어디선가 타일르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뒤를 한번 돌아보고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나풀거리는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크게 웃어보이고는 다시 도망치듯 달려갔다.

 

멍하니 그녀가 달려가는것을 보다가 문득 목소리가 난곳을 찾기위해 뒤를 돌아보자 바 입구 한켠에
녹색페인트가 거의 벗겨진 나무의자 위로 한 노인이 앉아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는 멋스럽게 구부러진 밤색 파이프 담배를 하얀수염이 덮수룩하게 난 입에 물고 천천히 의자에 걸쳐 있던 비치타올을 내게 던지고는 옆자리에 앉으라는듯 눈짓을 했다.

 

나는 노인이 건넨 비치타올로 물기를 닦으며 축축해진 상태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파이프 담배를 뻐끔 뻐끔 피며 세월에 쳐져있지만 바다를 꿰뚫을듯한 총명한 눈빛으로 밀려들어오는 파도를 보고 있었다.

 

머리위로 노란색 천이 그늘을 만들기 위해 얇은 막대기 하나에 
묶인채로 나부끼는 바람이 춤을 추게 만들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저 멀리 모래사장 끝이 보이고 나즈막한 언덕위에 붉은색  지붕 이 있는 하얀 집이 보였다

멀리서도 왁자지껄한 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걸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것 같았다. 

 

크림색 모래로 뒤엎힌 저쪽에는 몇몇 젊은 청년들과 아가씨들이 장난을 치며 물장구를 치고 있었고 그 청년들중 한두명은 방금전 물을 끼얹은 사람같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이목을 끄는 에이미라는 이 비현실적인 미모의 아가씨는 물장구를 치다가도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들곤 했다.

 

"기분이 어떤가?"
노인이 파이프에서 입을 떼고 연기를 코로내뿜으며 말을 했다.

 

"네?"
나는 타올을 손에 쥔채로 노인을 보며 물었다.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파이프로 에이미가 있는쪽을 가리켰다.

 

혼란스러 웠다. 이 노인은 내게 말을 했는데 그 말소리는 어느 영화에서 나오는 꿈속의 말처럼 울리지 않았고 정확하고도 또랑 또랑하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건 꿈이다.. 이건 꿈이다.."
나는 애써 현실을 직시하려 머리속으로 계속 되네었다. 
너무나 현실적인 이 꿈속에서 갑작스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에 힘을 준다음 천천히 한쪽눈을 떴다.

 

바다가 보인다..

 

꿈인데도 꿈에서 깨어나질 않고
노인은 나를 보며 그 특유의 따뜻한 미소를 계속 짓고 있었다.
갑자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무이유 없이 노인과 큰소리로 웃었다. 그는 무릎을 연신 손바닥으로 내려 치더니 
이젠 거의 숨넘어갈 듯이 웃었다.

 

나는 웃으면서도 계속 내 팔 다리 볼을 꼬집으면서 이게 꿈이 아니라는걸 일깨우려고 했다 노인은 그런 나를 보면서 숨을 가다듬더니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내 팔을 아주 쎄게 꼬집었다.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것처럼 느껴질정도로 아파서 바닥에 뒹굴며 팔을 부여잡았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아픔에 작아진 시야 사이로 노인은 거의 실신직전 처럼 웃고 있었다.

 

가까스로 의자에 앉아 꼬집힌 부분을 쓰다듬으며 정말 살점이 떨어진게 아닐까 걱정스런 눈빛으로 팔을 살펴 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파이프를 물고 있는 노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건 꿈이예요"
내가 입을 열었다.

 

"꿈이라고 믿겨질 정도로 행복하지"
노인은 연기를 코로 내뿜으며 말했다.

 

"아니 진짜 꿈이라구요"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고 노인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나를 보며 연기를 몇번 뿜고  다시 바다를 바라 보았다.

"나는 분명히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갔고 뻗어서….그리고 이런 꿈을 꾸고 있는거죠"

 

노인은 나의 말에 또다시 실소를 머금더니 마치 TV속의 코미디언을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나도 꿈속의 사람인가?"
노인이 말했다.

 

"그렇죠 근데 꿈치고는 너무 리얼해서 문제네요 아까 꼬집으신것도 너무 아프고"
나는 팔안쪽을 돌려 보았고 퍼렇게 멍이 들기 시작하는걸 보고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 살며시 문질러보았다

 

"안타깝구만 이왕이면 젊은이로 나타나게 해주지 다 늙은 노인네로 나타나게 하다니"
노인은 웃으면서 다시 파이프를 물었다.


"꿈이긴 한데 기분이 좋네요 늘 꿈꾸던 곳이예요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행복한 사람들이 있고 마치 파라다이스 같처럼"

 

"그 행복에 겨워서 꿈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닌가?"

 

"이게 현실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원래 현실은 무얼햇는가?"

 

"그냥 뭐... 별거 없었어요 그냥 일하고 놀고 마시고 자고..."

노인은 내말을 들으며 연신 웃음을 짓다가 내 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야 가끔 달콤한 꿈을 꾸지 젊었을때로 돌아가는 꿈 관절염에 시달리지도 않고 계단을 오를때도 숨을 가다듬지 않고 높은곳에서 뛰어내리는것을 두려워 하지않으며 지나가는 아름다운 아가씨한테 추파를 서슴없이 던질수 있었던 때로 돌아가는 꿈 나는 그런 꿈을 꿀때면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것을 느낄때가 있어 그럴때면 나는 그 꿈이 깨어지기전에 내가 하고싶은것을 마음껏하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달리기도 하고 새빨간 포르쉐에 올라타서 아름다운 아가씨와 케이블 비치의 석양을 보며 달리기도 해 "

노인은 아스란히 회상에 잠기듯이 눈을 감으며 말하다 파이프의 불이 꺼진것을 보고 성냥을 하나 꺼내 담배를 다시 피웠다.


연기가 두어번 허공에 퍼지고 파도는 연신 모래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 정말 자네가 있는 이곳이 꿈이라면 자네 말처럼 파라다이스
같다고 하는곳에서 무얼 할것인가?"

 

나는 노인의 말에 아무말도 할수 없었고 그는 나를 보며 미소를 한번 짓고는 바다를 보며 담배연기를 뿜었다.

 

노인의 말에 뭔가 복잡한 이 상황에 정답 같지 않은 정답이 내려진것 같았지만 쉽사리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이꿈에 있던 시간이 너무 짧았다.

 

"조심해!!"
어디선가 비명소리와 함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렸을때  공 하나가 얼굴에 묵직한 소리와 함께  부딪혔다.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듯한 고통과 함께 눈이 감기면서 잔뜩 찌뿌린
얼굴의 사람들이 내게 달려오는것이 보였다.


- 4 -


머리속을 드릴로 후벼 파는 듯한 고통에 눈을 떴다. 
또다시 시작된 숙취인가 싶어 머리를 감싸쥐다가 늘 있던 자리의 시계를 더듬었으나 손이 뻗치는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한쪽 눈을 찌뿌린채 주위를 둘러보다 뭔가 머리에 얹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곁눈질로 옆을 보니 파이프를 물고 있던 노인이 내 머리에 손을 짚고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드나"
노인이 말했고 나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노인을 보곤 아직 꿈속이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머리가 깨질듯이 아픈걸 너무나 현실적으로 느껴 꿈인지 현실인지 
더욱 분간이 되질 않았다. 

손을 올려 머리를 짚으니 하얀 수건이 덮여있었고 차가운 물에 적셔 있었다. 
천장에는 5개의 커다란 프로펠라가 달린 실링펜이 천천히 돌고 있었고 하얀색으로 얇은 케노피가 말아올려져 있었다. 
연한 갈색의 벽지로 둘러싸여져 있는 방에는 부드러운 야자수잎을 엵어 깔아놓은 카페트와 엔틱한 화장대가 멍뚱그레 놓여있었고 그 옆엔 커다란 전신거울 하나가  창밖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하얀 레이스 커튼을 살랑거리며 풍만한 여인의 가슴처럼 부풀어졌다.

몸을 잠깐 일으키려 침대를 짚으려 하자 뭔가 발쪽에 묶여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곳엔  에이미가 작은 의자에 앉아 침대에 얼굴을 묻은채 자고 있었다.

나는 그모습에 어찌할줄 모르고  노인을 쳐다 보았지만 노인은 양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희미하게 신음소리를 내며 에이미가 눈을 비비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벌떡 일어나더니 다짜고짜 나의 볼을 두손으로 꽉 부여잡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적응되지 않는 맑은 눈망울이 10센티도 안되는 곳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으니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 거리고 바람에 실려온 향기가 코끝을 지나 후각신경세포가 그녀의데이지 향기를 대뇌에 전달하고 나는 순식간에 황홀감에 감싸져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이분비 되면서 머리속에 두통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괜찮아?"
그녀가 말했다. 
처음으로 들은 그 목소리는 뭔가 일반 사람들보다 반 톤정도 높게 들리지만 
왠지 모르게 외모에 어울리는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 눈망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썹이 스키 머리부분 처럼 위로 올라가면서 미간을 점점 찌뿌렸다. 

"아...."
무슨말이라도 해야 할것 같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새에  그녀는 펄쩍 뛰어서 방밖으로 뛰쳐나갔고

쿵쾅 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한바탕 큰소리가 오갔다. 

소리가 잠잠해지기도 전에 이번엔 뭔가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며 이윽고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무더기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듯 서있었고 그사이에 에이미는 시뻘게진 얼굴을 울그락불그락 붉히며 주먹을 불끈쥐고 매우 화가난 표정으로 서있었다.


방안의 공기가 어색함에 무겁게만 느껴졌다. 

나를 마치 동물원에 인기있는 코끼리가 쓰러진듯 쳐다보고 있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에이미는 나를 잠깐 보고는 바로 고개를 홱 돌리고는 그녀의 옆에 곱슬거리는 
금발머리에 나와 같은 디자인의 붉은색 비치팬츠를 입은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빈!!"
에이미가 소리치자 그 금발의 곱슬머리 남자는 쭈삣 쭈삣 한발자국 앞으로 나오더니 
슬금 슬금 내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에이미를 한번 쳐다보았고 에이미 뒤편에 사람들이 그를 향해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서있었다. 

그는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무겁게 열었다.
"미안해.."

나는 그의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그와 에이미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크게!"
에이미가 소리쳤다.

"에담이 했어! 내가 아냐!"
마빈은 움찔하더니 얼굴이 붉어지면서 어깨를 한껏치켜세우고 
에이미 뒤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에이미 뒤편에 서있던 짧은 금발머리의 남자가 낮에 내 얼굴을 격파했던 공을 마빈에게 던졌고 마빈은 재빨리 그공을 피하고 짧은 금발머리 남자에게 달라들었지만 에이미의 옆에 서있던 덩치큰 아주머니의 손에 한쪽귀를 잡힌채로 아프다며 아우성을 쳤다. 

에이미는 울그락 불그락 거리는 표정으로 마빈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후려 갈긴 다음 얼굴색을 가라앉히고 나에게 다가와 내볼을 만지려 손을 뻗었다. 

순간 정신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그녀가 뻗는 손에 움찔하며 
고개를 젖히자 그녀는 놀란 토끼눈을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숙모... 그가 이상해.."
에이미는 두손을 입가에 모으고 뒤를 돌아 덩치큰 아주머니를 쳐다보며 말햇다. 

적어도 100킬로는 나갈것 처럼 보이는 사모아인 같은 아주머니는 검은머리를 질끈 묶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마빈의 귀를 한번 잡아당겨 방문으로 내팽겨치고는 내게로 다가왔다.

이 아주머니는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 구석구석을 짚더니 눈가를 눌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니?"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들려왔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대답앞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럴수록 에이미의 얼굴은 점점 심각함을 표현해왔다. 

방구석에서 나즈막히 신음을 내던 마빈도 엉거주춤하게 서서 나를 쳐다보았고 모든 사람들이 내가 입을 열기만을 보고 있는것 같았다.

그 숨막히는 공간속에서 내 머릿속은 미친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 꿈인데.. 꿈이라고 말해야 하나.. 나는 꿈속이고 당신들은 내 꿈속에서 나오는 상상의 인간들일 뿐이다. 근데.. 꿈이라고 말하면 이게 뭐가 되는거지?'
나는 에이미와 메리숙모라고 불리는 덩치큰 아줌마를 연신 번갈아 보았고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여기가. 어디죠?"

순간 방안에 적막이 돌더니 갑자기 방문에 서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이미가 울음을 터트리고 사모아인 같은 숙모는 침대에 걸터 앉아 무슨 기도문 같은것을 외우는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는것을 보고 어쩔줄 모르고 서있었고 숙모는 화장대로 가서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와서는 에이미의 작은 어깨를 감싸쥐고는 일으켜세워서 방을 나가며 내게 쉬라고 말했다. 
방구석에 서있던 마빈은 안절부절하더니 메리숙모의 손아귀에 귀를 잡히고 방을 나갔다.

얼마지나지 않아 창문 너머로 구식 포드 픽업트럭 한대가 오고 있는걸 보았고 검은색 바탕에 회색 스트라이프 무늬의 슈트를 입은 의사가 와서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나갔다. 
나는 또다시 혼자 남겨진 방에서 천천히 일어서서는 창문가로 가서 밖을 내다 보았다.


2층에 위치한 방에서 창문 밖으로 보는 경치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수가 없었다. 
하얀 백사장이 저멀리까지 이어져 있었고 아득히 보이는 수평선 너머로 점점 내려가는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노을빛을 뿌리자 에메랄드빛 바다는 금빛으로 출렁였다.

크림색 해변의 모래사장에서는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며 처음 눈을 떴을때 있었던 바를 들락 거리고 있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에이미와 사람들이 들어왔다. 
에이미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보며 웃고는 있었지만 입을 꼭다물고 턱부분이 부르르 떨리는것을 보아 울음을 애써 참고 있는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것 같았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고 숙모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하고는 우울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기억상실증에 걸린것 같구나.."

나는 머리를 빠르게 돌리면서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다.
꿈인데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현실이라 말을 하니 나는 어쩌면 내가 주가 아닌 꿈속에
이방인으로 되어 있을테고...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아니고.. 아.. 머리가 복잡해진다.
일단 결론은 나는 이사람들에게 기억상실증이 걸린 남자로 앞에 서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을 하는 동안 숙모 옆에 서있던 마빈이 슬쩍 웃으면서 "그럼 네 스쿠터 내가 가져도 되는거야?" 라고 말하자 마자 숙모의 커다란 손에 등짝을 후려갈겨 맞고 사람들이 그의 눈앞에 손가락을 꽂꽂히 편채 주의를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또다시 웅성대기 시작했고 그중에 나이 지긋이 든 할머니 한분이 나와서는 에이미의 손을 꼭잡고 그녀를 위로했다.

"결혼식은 천천히 생각하자꾸나.."
할머니가 하는말에 나는 자칫 중심을 잃을뻔했다

"결혼식?!"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쳐다보았고 에이미는 가까스로 진정된 얼굴에서 내가 낸 이 한마디에 그 커다란 눈망울에서 폭포수처럼 눈물이 떨어졌다. 

결혼식이라니!"


한동안 방안이 시끌벅적해졌고 에이미는 이제 숨넘어갈듯 숙모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머리를 쥐어싸고 침대에 앉았다.


“우리가 좀 비켜줘야 할것 같다. 일단 쉬는게 좋겠어”

숙모가 말하자 사람들은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엔 좋기만 했던 꿈이 예상치 못한 일들로 내 머리를 휘저어 아프게 했다.


몇번을 온몸에 힘을 줬다 뛰어올라봐도 좀처럼 이 꿈같지 않는 현실에서 탈출할수 없었다.

오히려 차오르는 숨에 폐가 터질것 같이 부풀어 올르고 미친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은 살아있다는것을 더 확실히 느끼게  했다.


꿈에서 깨길 포기한채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문밖을 보았다.

간간히 날아가는 갈매기가 노을지는 하늘을 가르고 조용한 파도 소리는 내게 진정하라는듯 타일르는것 같았다.

헐떡이던 숨을 가라 앉히며 창문가에 서서 여전히 놀라운 저녁바다를 보고 머리속을 정리하려 했다.


결혼식이라니…

여태껏 생각해본적도 없고 하고 싶다고 느낀적도 없었다. 아니 인생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는 아예 배제시키고 살아왔는데 당장 결혼이라니 고개를 저으며 한숨만 내쉬었다.


고개를 숙인채 애꿎은 창문틀만 흔들고 있을때 방문 손잡이가 쇳소리를 내며 천천히 돌아가는것이 보였다.

“뭐지?” 하는 생각에 보고 있으니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한 여자가 미끄러지듯 방안으로 들어왔다.

밝은 갈색의 머릿결이 풍성하게  말린채 그녀의 둥그스름한 어깨를 감싸고 붉은색 버버리 코트는 겉옷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낼 정도로 타이트 하게 감싸고 있었다. 짧은 미니스커트 인지 아무것도 안입은듯한  맨다리를 드러낸채 내게 뚜벅 뚜벅 걸어오는 여자의 화장이 매우 강렬하게 보였다.


“누구…”

내말이 미쳐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이 덥쳐왔다.

어찌나 강렬하게 다가왔는지 나는 침대에 쓰러질까 안간힘을 쓰며 중심을 잡으며 허우적 거렸다.


내가 그녀의 팔을 잡고 밀쳐내자 그녀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손등으로 자신의 입술을 훔치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준비됐어?”

그녀는 작은 핸드백에서 붉은색 립스틱을 꺼내 바르며 말했다.


“무슨말이지? 그보다 당신은 누구지?”

나의 말에 그녀는 일순간 멈춰서서 나를 쳐다보다니 그 큰입을 벌리며 웃어댔다.


“연기 잘하는데 당신 그런 재주가 있는지 몰랐어”

그녀는 눈가에 주름이 질까봐 눈매를 손가락으로 살짝 딛으며 웃음을 거두었다.


“뭐..요?”


“하지마 이제 재미없으니까”

그녀는 차갑게 말을 던지고는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 챙겨왔어 당신도 참 머리가 좋은거 같애 이렇게 되면 아무도 우릴..”


“아니 그니까 당신은 누구냔 말이오”

내말에 그녀는 정색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문이 벌컥 열리고 에이미가 들어왔다.

그녀의 눈이 퉁퉁 붓고 흰자위가 빨간것으로로 보아 한참을 울고난후 인거 같았다.

“아.. 안녕 신디”

에이미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신디라는 여자는 나를 한번 흘겨보고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안녕 에이미” 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갔다.


“저기.. 밑에서 같이 식사를 해야 되는데..”

에이미는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 네.. 내려가죠”

나의 말에 크게 숨을 내쉰 그녀는 창가를 보며 울음을 참는듯 보였다.


계단을 내려와 거실 가보니 20~30명쯤 되는 사람들이 모여 소곤 소곤하게 얘기를 나누다 나의 등장에 말을 감추는것 같았다. 이 어색한 공간에 멀뚱히 서있자니 숨이 막히는듯 한 정적이 집을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했다.


음식을 먹는 내내 포크가 스치는 소리만 간간히 울리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내 눈치를 보는듯 내가 뭐 하나먹을때마다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장례식장처럼 숨소리 조차 숨기며 조용한 식사가 끝나고 젊은 층의 사람들은 산책을 가는지 나가는 하나둘씩 흩어졌고 몇몇 나이지긋한 사람들만  거실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쇼파에 둘러 앉아 식후의 포만감에 늘어져 있었다.

이층으로 다시 올라가기도 뭐하다 싶어 벽에 기대어 서있다가 한켠에 놓여있던 조그만 쇼파에 기대 앉았다.

무료하기도 하고 좀처럼 어색한 자세를 주체하지 못해 작은 탁자에 놓인 조명등 스위치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쇼파에 멀뚱이 앉아있는 내게로 와서 손을 한번 잡고 괜찮다는 듯 어깨를 두들겨 주곤 했고 나는 그때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 불편한 자리가  목을 죄어오는듯 하게 느껴져 어디라도 나가지 않으면 졸도 하겠다 싶었다.

해변이라도 나가볼량 일어섰을때 누군가가 위스키가 담긴 술잔을 불쑥 내밀었다.


갑작스런 호의에 “감사합니다.” 하며 올려다보니 말끔한 슈트를 입고 포마드로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로 흰머리가 히끗하게 보이는 중년 신사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괜찮나?”


“아.. 네..”

나는 술잔을 받아 들고 한모금 마셨다.


“어디까지 기억나나?”


“네?”


신사는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나를 보았다.


“글쎄요…”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에이미는 내 조카야”


“안녕하세요”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그는 내가 내민 손을 보며 멋쩍은듯 잡았다.


“초면도 아닌데 어색하군”

그의 말이 틀린말이 아니기도 하고 좀처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 못잡는나를 재밌다는듯이 쳐다보는게 심술궂어보이기도 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제 자네의 가족이 될 사람들이네”

그는 주위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족이 참 많네요”


“그래서 더 좋아했지 않나”


“제가요?”

나의 물음에 그는 술을 한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언제나 중심이었지 제일 목소리가 컷었고 무슨일이든 자네가 안나서는 법이 없었어”


“그랬군요”


“이미 우리 가족이었지 자네가 온다고 하면 저 귀먹은 할머니까지 방에서 나오시니까”

그는 거실 한쪽 구석 창문에 흔들위자에 곤히 앉아있는 할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

나는 한숨을 쉬며 술잔을 들이켰다.


“신기하군”


“네?”


“기억을 잃어버리면 성격도 바뀌는건가”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다른가요?”


“말했잖나 목소리가 제일 컷다고”


“상상이 안가네요”


“나는 늘 집에 올때면 차를 멈춘 순간부터 집안에 자네가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어”


“믿을수가 없군...”

나즈막히 내뱉은 혼잣말에 신사는 술을 한모금 더 마시고 가만히 뭔가를 생각해내는듯 했다.


“아! 저기 천장 위에 금가 있는곳 보이나?”

그는 거실 한쪽의 천장에 실금이 가있는곳을 가리켰다.

“저게 마빈이랑 누가 더 높이 뛰냐 마냐 하며 뛰다가 주먹으로 올려친곳이네”


“저기를요?”

나는 그 높은곳을 어떻게 쳤을까 생각했다.


“그밖에도 여기 새겨져있는것들은 많지 해변에 그 간이바 기억나나? 낮에 쓰러졌으니까 거긴 기억나겠지?”


“네”


“거기도 자네가 만든거야”


“제가요?”


“그럼 마빈과 몇일 뭔가 쑥덕 거리더니 그 해변에 그렇게 기똥찬걸 만들어놨더군”

그는 나를 대견스럽다는듯이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시골에 저런걸 만들생각을 다하니 대단한거지 덕분에 따분하고 노인들이나 넘치던 마을이 이제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파티가 열리니까. 활기를 찾았어 아니 활기찬건 내가 태어난 이래 처음인거 같군 이제는 옆마을에도 똑같은게 생기고 말이야 우후죽순으로 생긴다고 한들 원조같을수가 없지 저번달만해도 해변에 발디딜틈이 없었어”


“와우…”


“대단햇지 첨에 우린 쓸데없는 짓 아닐까 염려 했었거든 개시 했을때는 별로 그렇게 이목을 끌지 못했어 그래도 자네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마빈을 데리고 해변을 청소하고 사람들이 머물게끔 벤치를 만들고 바를 가꾸어나갔지 자네가 만드는 칵테일 시음때문에 난 여기만 오면 만취가 되서 집에 돌아갈수가 없었다니까”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런데 딱 한달만에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왔어 소문이 소문을 낳은거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걸 보니… 아 사실 난 자네를 처음엔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그냥 나같은 한량인줄알았거든”

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술잔을 부딪히고 마셨다.

나는 그 판타지적인 나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술잔이 비었다는것도 잊은채 빠져들고 있었다.

“내가 또 어떤걸 했는지 알수 있을까요?”


“이봐 그걸 일일히 말하면 아마 밤새야 할걸세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네 얘기를 하면 하룻밤이 꼬박 지나가겠지”

내가 머리를 감싸쥐고 믿을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온화한 웃음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자네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고 멋있는 사람이네”


나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그저 그의 말이 그 칭찬이 귓속에 파고 들고 뭔가 없던 기억이라도 끄집어 낼것만 같았다.


“에이미는 자넬 정말 좋아한다네. 자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행운을 불러일으킨다고 믿는것 같아.”


“행운이요?”


“행운. 그아이의 인생에 자네는 정말 많은걸 안겨줬어 여행을 떠나고 뭔가를 만들고..”

그가 말하는 동안 나는 에이미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제서야 마지막으로 봤었던 그 붉어진 눈시울이 떠올랐다.

“걱정말게 모든건 잘돌아갈테니까 늘 그랬듯이 말이야..한잔 더할텐가?”

그는 일어서서 내게서 술잔을 가지고 갔다.


신사와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주위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서로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제 나와 눈이 마주친 이들은 살짝 웃어 보이고 나를 걱정하는 눈빛에 따스한 가족의 느낌이 묻어났다.

낯설기만 했던 이 집안이 한결 포근해짐을 느끼고 가구하나 기둥 하나까지 모두 내 손때가 묻어있는것처럼 느껴졌다.


주변을 바라보고 미소 짓고 있는 사이 반대편 쇼파에 한 꼬맹이 녀석이 앉았다.

뭔가 때묻은듯한 카키색 바지와 원래 흰색이었을 누르스름한 옥스포드 셔츠에 하루종일 땀흘리며 뛰놀았는지 정돈되지 않는 머리칼이 말썽쟁이를 꼽는다면 딱 이 이미지였을것 같다.

녀석을 더 이상하게 만드는것은  뭔가 나를 째려보는듯 하는 그 눈빛이었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를 감시하듯이 이제는 팔짱을 낀채 쇼파에 거만하게 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얘도 가족이겠지 하는 생각에 손을 작게 흔들어 인사를 했다.

“안녕?”


녀석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며 아무말이 없었다.

한동안 이녀석은 뭘까 하며 생각하다 별볼일 없을거 같기도 하고 에이미의 삼춘이라는 그 멋진 신사가 술을 가져다 주지 않아 직접 찾아 갈겸 일어서려 했다.


“병신”


나는 그게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알아챘지만 설마하는 생각이 들어 돌아보았다.


녀석은 분명히 나를 보고 있었다.


“뭐?”


“병신”

녀석의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누구하나 이 어린애의 말을 들은것 같지 않았다.


“뭐라고 한거야?”


“귀가 먹었나 병신이라고”

녀석의 말은 이제 나의 성격을 시험하는 정도를 지났다. 당장이라도 녀석을 들쳐메고 엉덩이를 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할때 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뛰어나가며 나의 종아리를 쎄게 걷어찼다.

순간 욕이 입밖으로 튀어나갈뻔하게 아프게 느껴졌다.


“하하.. 그만하게”

신사는 어느새 술잔을 채워 내게 내밀었다.


“아니  저녀석이”


“놔둬 불쌍한 아이야”


“뭐라구요?”


“외로워서 그러네”

그는 눈살을 찌뿌리며 가엽다는듯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아스라이 쳐다보았다.


“외롭다니요”

나는 쩔뚝거리며 정강이를 손으로 쓰다듬고 술잔을 받아 들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거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표현 하는게 서툴러”


“그런게 저녀석이 하는짓을 정당화 할수 없습니다. 저건 혼내줘야 해요”

나의 말에 그는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자네 입에서 그런말을 들으니 신기하군”

그는 내게 실망하는듯 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내가 하면 안될말을 한것처럼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나는 그의 행동에 뭔가 있다고 느꼈지만 물어볼수가 없었다.

“에이미 에게나 가보게 해변에 있을걸세”

그는 그말을 남기고 가족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저녁 공기가 매우 상쾌 했다.

한 낮동안 뜨겁게 달궈놓은 모래를 재우듯 시원한 바람이 불면서 잠시나마 복잡했던 머리를 씻겨주는것 같았다.

집에서 나오자 마자 보이는 바닷가의 벤치위에 앉아있는 에이미가 보였다.


천천히 걸어가서는 생각에 잠긴 에이미에게 인기척을 보냈다.


“왔어?”


“흠…”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그녀에게서 좀 떨어져 앉았다.

해가 다 져물어간 바다 저멀리 수평선은 빨갛게 흔적만 남아있었다.


“당신은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걸 좋아했어”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짓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밤이 되면 여기 앉아서 달을 구경하고 노래를 부르고 했지”


“노래?”

노래를 불렀다는것에 신기해하며 물었다.


“아! 물론 못불렀어 박자도 안맞고 그냥 흥얼 거렸지”


“아하하 그랬군”


“그런데도 좋았어 딱 하나 술을 너무 좋아한거 빼고”


“그건 여기나 저기나 똑같군”


“응?”


“아니야”

내가 웃자 그녀의 미소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우리는 한참을 파도를 바라보고 앉았다.

밤바다의 고요함이 이런것이었나 하고 보고 있자니 문득 내가 바다를 보는건 태어나서 두번째 인거 같았다.

미치도록 보고싶어서 두다리를 이끌고 터벅 터벅 걸어갔던 곳은 생각보다 너무 추워서 정신이 없었던것 같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전에 온몸이 얼어버려서 바삐 돌아왔던거 같다.

무슨말이라도 해야 할거 같은 느낌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채로 있는것보다 차라리 한번에 알아보자는 셈에 입을 열었다.


“저기”


“응?”


“나에대해서 말해줄래?”


“자기에 대해서?”


“응.. 뭐 어찌됐건.. 일이 이렇게 됐긴 한데 일단 알고 싶어서”


“휴…”

나의 말에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어디서 부터 얘기해야 하지…”

그녀는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막연하면 궂이 얘기 안해도..”


“힘이 넘쳤어”


“힘?”


“뭔가를 들고 뛰고 하는 힘 말고 항상 뭔가 에너지가 넘쳤어 유쾌했고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내가?”


“응 항상 그랬어 처음 보는 사람이랑도 내가 잠깐 자리 비우고 오면 정말 친한 친구처럼 있었어”


“멋진놈 이었군”


“뭐야..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어”

그녀가 볼멘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음엔 뭔가 좀… 공격적이라고 해야 하나?”


“공격적?”


“좀 방어적이기도 했고 그거때문에 좀 애먹긴 했었어 그런데 보면 볼수록 좋았어 변하기도 했고 주위사람들을 너무 잘챙겨서 질투가 좀 나기도 했었어”


“우리.. 오래 만났었나?”

나의 질문에 그녀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 졌었다.


“응.. 오래만났었어 아주 오래”


“그렇군..”


“그래도 늘 처음 같았어 항상 새로웠고 웃고…”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슬퍼 보이는것 같아 화제를 돌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음… 그런데 나 직업이 뭐였어? 뭘하고 있었어?”


“응? 직업?”

그녀의 얼굴빛이 달라지는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무슨일했었어?”


“음…. 딱히 없던거 같은데?”


“뭐?”


“직업은 딱히 없었던거 같아 그냥 저기 저 바 만들고 나서는 그냥..”

그녀는 낮에 내가 맥주를 마시던 바를 가리켰다.


“뭐야.. 그럼 백수야?”


“아.. 그러네?”

그녀도 이제 깨달았다는듯 말했다.


이런곳에 살고 있으면서 예상도 못했던 백수라는 직업에 나는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진짜 백수 였다고?”


“응”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대답했다.


“맙소사.. 백수라니”


“왜?”


“아니..아.. 근데 백수 인게 아무렇지도 않아?”


“그게 왜?”

그녀는 나의 질문에 오히려 왜 그런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하…. 하긴”

나는 꿈에서 직업이라는게 뭐 대수랴 하다가 아니 어쩌면 저런 번듯한 바를 하나 가지고 있는 사장이니 현실에서 손바닥한만 사무실 속에 갇혀있는것보다 백배천배 낫다고 생각했다.


“저기 내가 어디까지 기억나?”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입을 열수 없었다.

“괜찮아…”

눈가가 촉촉해 질것만 같아서  다시 화제를 돌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프로포즈 같은것도 했어?”


“프로포즈? 했지!”

그녀는 빠르게 기억을 재생시키는듯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추억으로 빠져들어가 다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했어?”


“우리 로마에 갔었어”


“로마??”

나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응 로마에 갔었지 정말 좋았어”

그녀의 함박웃음이 얼만큼 행복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스페인 광장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었어”


“로마의 휴일인가…?”


“응 맞아 근데 아이스크림은 맛이없었어”


“관광지가 다 그렇지뭐”


“그래도 좋았어 날씨도 너무 좋았고”


“프로포즈는 언제 했는데?”


“그땐! 노을이 질때쯤이었어”


“그래서?”


“트리니 분수로 가자고 했어 난 솔직히 다리가 너무 아파서 그만 걷고 싶었는데 자기가 그렇게 걸어가자고 해서 사실 좀 짜증나 있었어 그래서 도착했는데 동전도 던지라는거야 귀찮아서 던질려고 할때 눈을 감고 던져야 한다고 그렇게 말해서 입이 이만큼나왔었지”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그때의 모습을 따라했고 그 과장스런 행동이 나를 웃겨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던지고 눈을 떳는데!!!”


“떳는데?”


“이렇게 무릎 꿇고 반지를 보여줬어”

그녀는 내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채 자신의 손에 끼어진 반지를 내게 보여줬다.


“이야…”

나는 그 모습에 나를 그리며 그런 로맨스를 펼친 자신이 사뭇 대견스러워졌다.

그녀는 한창 들떠있다가 다시 현실에 돌아와선지 조용히 벤치에 앉았다.


“고마웠어”

그녀가 말했다.

“기억 못해도 고마웠어 고맙다고 얘기 할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새침하게 굴었어 미안해..”


조금씩 흐느끼려 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뭐라고 말하고 싶지만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기억할수 있게 더 얘기해줄래?”


그녀는 손을 좀처럼 가만두지 못하고 제스처를 취하며 나와 있었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해변의 바를 처음 만들때의 얘기와 스쿠터를 타고 여행을 갔던 얘기, 처음 가족을 만날때의 그 뻣뻣하고 긴장했던 모습들 그리고 얼마나 이사람을 사랑했는지 사랑한다고 말했는지 편지를 쓰고 생일에 같이 캠핑을 떠나서 급작스런 폭우에 죽을 고생을 한것 하며 이제 그 시간들을 지나 결혼을 하게 되는것 까지 많은 얘기들로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대단하구만”


“뭐가?”


“항상 같이 있었다는 거잖아”


“글쎄.. 그런가?”


“그럼 비밀 이런것도 없었겠군”


“그런게 있을.. 아?”

그녀는 뭔가 생각난듯 눈을 반짝였다.

“일기장 같은게 있던거 같은데 그건 절대 안보여줬어”


“일기장?”


“가끔 보면 혼자 뭘 막 쓰고 있었는데 그건 물어봐도 안보여주고 어디 숨켜놓는거 같던데”


“그래?”

나는 그말에 어쩌면 그 일기장이 여기저기 나에대해 물어보는것보다 나를 더 많이 알수 있겠다 싶어 찾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

에이미가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줄래?”

한참을 뜸들이는 그녀의 질문이 뭐가 나올지 몰라 조금씩 두려워졌다.


“나.. 지금은 어때?”


“무슨..말이야?”


“기억나는게 없으니까… 나에대해  지금은.. 어때?”


“어떠냐고 하면..어떤걸?”


“사랑해?”

그녀의 말에 머리속이 멍해졌다.

사랑 이라니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고 말해본적도 없는 사랑한다는말을 물어보니 당황스러워졌다.

어둠속에서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보고 있는게 또렷히 보였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향긋한 데이지 향이나는 살결과 부드러운 머리칼이 바람에 따라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어떻게 이런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망설일수 있을까 내 자신을 탓하며 대답하려 할때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하나둘 떨어져 얼굴을 적시더니 순식간에 폭우가 내려왔다.


우리는 벌떡 일어나 신발을 쥐어 들고 집을 향해 뛰어갔다. 갑작스레 뛰는 탓에 중심을 잃어 넘어질뻔하는 나를 보고 에이미는 큰소리로 웃으며 멈춰서는 바람에 온몸이 다 젖어버렸다.

어느새 맞잡은 손이 설레여 명치께가 아려왔다. 집앞 처마에 서서 쏟아져 내리는 비를 보며 웃고 있다가 문득 눈이 마주쳤다.


비에 젖어 촉촉해진 얼굴과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눈망울이 블랙홀처럼 나를 빨아들이는 것같았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천천히 그녀의 허리에 감싸 안자 내 허리를 살며시 쥐는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우리는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갔고 이내 숨결이 느껴질만큼 가까이 얼굴을 맞대었다.

분홍색으로 상기된 볼과 살짝 벌려진 앵두같은 입술이 내 눈을 서서히 감기게 만들었다.


“이런~ 걱정했잖니”

문이 벌컥열리고 집안에 있던 가족들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집안으로 들어갔고 그녀는 응접실로 나는 2층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봤지만 숙모가 나를 보면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것 같았다.


설레는 가슴을 부여잡고 멈출줄 모르는 이 생소한 기분에 웃음이 절로 나와 종종 걸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절로 나오는 콧노래에 셔츠 단추를 풀르고 방에 불을 켰다. 실실거리며 그 가슴벅찬 순간을 다시 떠올리다가 생각해보니 여자와 키스하며 설레는 감정을 느낀게 언제 였는지 궁금해졌다.


“언제였더라….”

시간을 빠르게 재생하며 찾아봐도 몇몇 생각나는 여자들의 입술은 그저 진도를 더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요 책속에 읽지 않고 넘겨버리는 머리말 같은 존재였다.

아차 그러고보니 아주 어렸을때 다짜고짜 입술을 부딪혀 엉엉 울렸던 여자아이가 생각난다. 잘기억은 안나지만 그때 나 또한 적잖게 충격을 먹은것 같다. 그뒤에 얼굴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주근깨가 가득한  여자와 키스한게 처음이었던거 같다.  첫키스 맛은 약간 상하기전의 미지근한 문어가 입안에 들어온거 같다. 깜짝놀라 고개를 뒤로 빼려 했지만 머리통을 꽉쥐고 놓아주질 않아 어떻게 할수없이 입만 벌리고 있었던거 같다. 그후로는 본체만체 지냈고 왜그러는지 몰랐었다. 지금생각해보면 나도 참 한심하고 못났던거 같다.


고개를 저으며 혀를 한번 차고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지를 벗으려 허리 단추를 푸르는 순간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았다.

붉은머리카락을 꼬으며 신디가 서있었다.

어찌나 놀랬던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다 다리가 풀려 주저 앉을뻔했다.


“여기서 뭐하는거야”

내가 소리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며 조용하라는듯 무언의 제스처를 취했다.

허리에 묶인 코트 끈을 풀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더니 훌렁 벗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그녀는 이제 검은색 코르셋과 속이 다 비치는 한장의 속옷 차림으로 내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다.


“뭐...뭐야..”


“쉿 왜그래”


나는 그녀를 피해 방을 가로질러 벽을 등졌다.

그녀는 나를 재밌는 놀이 하는 아이처럼 취급하며 다시 쫓아왔다,

뒷걸음질 치며 그녀를 피하다 중심을 잃고 침대에 기댔을때 그녀는 암고양이 처럼 뛰어올라 나를 짓눌렀다.


“왜이러는거야 당신 뭐야”


“호오.. 새로운 거야?”


“무슨얘기를 하는거야”


“재밌겠는데”


“빨리 비켜”

내가 소리치자 그녀는 손가락을 내입술에 갔다대고 “다 들리잖아” 라고 속삭이고는 귀를 깨물었다.

그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세게 밀쳐내고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부딪히며 나가떨어졌다.


벌떡 일어선 나는 뒷걸음질 쳐서 방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뭐하는 짓이야?”

그녀가 말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미쳤어?”


“당신이 미쳤어 이게 뭐하는짓이지?”


“하...진짜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거야 뭐야?”

그녀는 기가 차다는듯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낚아채서 들어올렸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문채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뭐야…. 자기.. 지금 거짓말 하는거지?”

그녀의 눈빛이 바뀌었다.

나는 그대로 그녀를 외면한채로 바닥만 쳐다보았다.


“진짜야? 진짜로 기억 못하는거야?”

그녀는 내게 달려와서 내 얼굴을 부여잡고 자신과 시선을 맞추려 애썼다.


“거짓말 하지마 이러면 안돼”

그녀의 말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나가주세요”

내가 말하자 그녀는 다리가 풀린듯 멈칫하며 내게 매달렸다.


“안돼.. 이러면 안돼..”

그녀의 말이 점점 절규 같이 들려왔다.

“이러면 안돼 안돼 내가 어떻게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러면 안돼”


“무슨말인지 모르겠으니까 나가주세요”


“니가 나한테 이러면 안돼 정신차려”

그녀는 내 뺨을 때리며 어떻게든 시선을 맞추려 했지만 완강하게 버티던 내게 한두어걸음 물러서서는 꿰뚫을듯한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

“우리 떠나야 돼”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거의 넋이 나간 눈빛으로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너 이러면 안돼 이런 개같은 상황을 만들기엔 너무 많이 왔어”


“이상한 말만 하는군 나가주세요”


“모르겠어? 모르겠다는게 말이돼? 너 나랑 도망 가려고 했어”

그 말에 머릿속이 까맣게 변하는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채 이빨을 깨물고 삭히는것 처럼 말을 이었다.

“이제와서... 이제와서 모르겠다고 ?”

그녀는 가까스로 숨을 삼켰다.

“ 연기 작작해 그만할때 됐어 짐도 다 싸놨고 차도 준비해놨어 기억이 안난다고? 무슨말인지 모르겠다고? 오늘 드디어 뜬다고 이 따분한곳에서 사라진다고 설레는 새끼가 누군데!”

그녀는 폭발할것처럼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며 주먹을 꽉 쥔채 서있었다.

“기억해봐.. 빨리.. 기억해봐 저기 저 옷장안에 든거 가지고 나가면 된다고 했잖아 그럼 우리 둘만 있을수 있다고 했잖아”


손끝이 저려왔다. 팔을 타고 지나와 가슴께에서 무너지는듯한 쓰라림이 터지고 머릿속은 누군가가 들어와 뇌를 훔쳐 달아난것 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겨우 버티고 있는 두다리가 여기 서있다는것만 느끼게 할뿐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어 얼굴을 갈겨놓을것 처럼 숨을 씩씩거렸다.

나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나가주세요”

내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내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몰아세웠다.


“개새끼 죽여버릴꺼야 아니 이대로  쳐내고 조용히 살려고 하는가 본데 두고봐 내가 여기를 나가서 저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너 지금까지 그 역겨운 두얼굴 모두가 알게 될거야 이곳에 얼굴 내미는 거 조차 못하게 만들꺼야 모든 사람들이 너를 보기만 하면 욕을 하고 돌을 던질꺼야 너는 그런 쓰레기 새끼니까 퉷”

그녀는 내 얼굴에 침을 뱉고 코트를 입었다.


“마지막 기회를 줄께 동이 뜰때까지 변하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하게 될꺼야”

그녀는 코트 허리끈을 단단히 묶고 방문을 나갔다.


나는 돌아설수 없었다. 그녀가 욕을 하며 지나갔고 온몸에 흐르던 빗물이 이제 간간히 한방울씩 카펫을 적셨다.

작은 의자에 털썩 앉아 휑한 방안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니 방문 앞에 저녁에 봤던 어린애가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저분하게 욕을 내뱉던 얼굴 나를 가여워 하는듯한 어린애 같지 않는 눈빛으로 한참을 서있다가 어두운 복도로 사라졌다.


축쳐진 어깨와 힘없는 손끝을 털어맨채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삶을 살고 있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과연 나는 여기서 뭘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떻게 살았길래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처해있는건가 머리를 감싸쥐고  끌어오르는 신음을 목구멍에 눌러 담았다.

잔뜩 찌뿌린 시야 사이로 옷장이 보였다. 문득 그녀가 가리켰던것이 보여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하늘하늘한 여름옷가지를 뒤적거리다가 발밑에 둔탁한것이 느껴졌다.

두꺼운 천으로 된 가방이 보이고  번쩍 들어 침대에 내용물을 모두 털어놓았다.

속옷과 몇가지 옷들 그리고  돌돌 말린 돈뭉치, 차키가 보이고 가죽으로 감싸져있는 작은 노트가 보였다.

보는 즉시  이것이 일기장이라는것을 알았다.


방문을 닫고 걸어잠근후 바닥에 앉아 일기장을 펼치자 사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한번도 기억해본적 없는  어린시절 사진 과 잊고 지냈었던 과거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보여졌다.

친구들과 뛰놀았던 그때 정처없이 길거리를 걷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던 그때 지금 보면 촌스러웠던 복장에 춤이라기 보다는 허우적 거렸던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 문득 마지막으로 들어올린 사진에 나는 멈춰버리고 말았다.

분명 혼자 걸어갔다고 생각했던 바다, 그때 그곳에 나는 친구들과 어색하게 굳은 모습으로 사진속에 서있었다.

일기장을 한장 두장 읽어갈때마다 이름조차 기억 나지 않던 친구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혼자 있지 않았다.

늘 함께 있었다.


어린시절 일기에 빠져 실소 지으며 읽다가 종이를 넘길수록 나는 머리를 감싸쥔채 가슴을 졸이기 시작했다.


-

신디라는 아가씨가 놀러왔다. 에이미의 친구라고 하지만 그렇게 친한것 같지는 않다. 뭔가 새련되고 말투가 다르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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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디가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내 스쿠터를 만지며 이 조그마한 걸로 얼마나 갈수있냐고 하길래 나는 오기를 부려 시내까지 달려갔다. 향기가 달랐다. 등에 느껴지는 젖가슴이 나를 흥분 시킨다.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순간 즐기고 있는것이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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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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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많이 취했었다. 젠장 이건 아닌데 . 차라리 안보는게 낫겠다. 에이미한테 더 잘해줘야 겠다. 내일은 시내로 가서 꽃 한송이를 사고 반지를 찾아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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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뾰로통 하다. 짐짓 생각하건데 에이미가 로마에 간다고 신나게 떠들때부터 뭔가 얼굴빛이 달라진거 같다. 한동안 신경 안쓸려고 했는데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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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큰일났다.

-


여기까지 이후로 몇달을 건너뛰고 다시 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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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생각보다 많이 모였다. 해변에 설치한 바는 내가 생각해도 최고의 아이디어 였던것 같다. 이정도로 벌릴줄은 몰랐는데 이제 갈곳만 찾아보면 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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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차지만 괜찮은 가격에 산거 같다. 어차피 거기까지 가기만 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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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다 끝났다. 일단은 신디에게 아무렇지 않게 오라고 했다. 요즘 에이미 낯빛이 좋지 않다.

-

드디어 내일이다.

-


이 이후로 쓰여진 글이 없었다.

이게 기억하기 전의 마지막 날이었던거 같다.

나는 일기장을 힘없이 떨구고 일어섰다.

터벅터벅 방을 나와 계단을 걸어내려왔다. 몇몇 사람들이 나를 봤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집을 나와서 무작정 걸었다.


잔뜩 물을 머금은 모래사장위를 뒤뚱뒤뚱 거리며 걷다보니 몸을 날려버릴것 같은 바람에 자칫 넘어질뻔했다.

태엽이 감긴 인형처럼 목적지 없이 땅만 보고 걸었다.

발끝이 닿는곳에 나무의자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밤새 비에 맞고 바람에 시달리는 해변의 간이 바가 흉물스럽게 서있었다. 얼기설기엮인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앉았다.

밖에 나부끼는 바람에 금방이라도 날라가버릴것 같이 흔들거렸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벽에 위태롭게 서있는 술병을 아무거나 집어 들고 열어 병째 들이켰다.


강한 알콜향이 입안에 퍼지고 구역질이 날거 같았지만 꾹 눌러 삼켰다. 목구멍을 지나 위를 타고 내려가면서 타는듯한 느낌에 두눈을 질끈 감았다.

연이어 입에 틀어넣자 이내 취기가 온몸으로 퍼져갔다.

칼바람이 당장이라도 목을 쳐낼듯이 몰아부쳤다.

햇빛 찬란하여 감탄했던 이 공간이 이제는 불태워 버리고 싶은 역겨운 공간으로 느껴졌다.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워 빙둘러보고 침을 뱉았다.

끊임없이 주절대는 욕으로 허공에 소리를 질렀다.

휘청거리며 테이블을 짚자 힘없이 넘어져버렸고  나무바닥에 얼굴을 깔아뭉갠채로 신음을 토했다.


이제는 이게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던것들이 모두 현실이 되고 나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여기에서도 쓰레기였다.

구역질이 나올것 같아 등을 기대 앉았다. 바닥에 나뒹구는 담배 꽁초를 보고 주섬 주섬 입에 물었다. 테이블 위에서 성냥을 가까스로 찾아  불을 붙였다.

살짝 젖은 담배꽁초는 불을 머금고 연기를 더욱 맵게 뿜어냈다.

귓가에 들리는 바람과 빗소리가 나에게 질타를 하는듯해 온몸을 웅크린채로 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술에 취해 설잠이 들어버린것 같다. 혼자 있었던 바안에 불빛이 빛났고 희미한 시야로 아직 밖은 깜깜한걸 보니 날이 밝은것 같지는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낮에 봤던 노인이 구석에서 홀로 담배를 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여길 불태워 버릴겁니다.”


“그래?”


“새벽이 오기전에 불태워버릴테니 드세요 술은 공짜입니다.”

나는 춤추듯 손을 허공에 그었다.


“아깝구만 그렇게 고생하며 지었는데”


“그 고생이”

나는 쉬어버린 목에 마른기침을 토했다.

“그 고생이 개같은 짓으로 만든건데 이 지랄같은 곳은 있을필요가 없어요”


“무슨말인가?”


“영감님…내가 꿈인것 같다고 한것 기억하나요?”

나의 물음에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현실인지 이제 알겠어요. 이제 왜 현실인지. 개같이 살고 있으니까 현실이예요. 나는 긴꿈을 꾸면서도 개같이 살았고 여기서도 똑같이 살고 있어요 말도 안되는 행복을 가지고도  병신 같이 살고 있어요 ”

나뒹구는 술병을 끌어잡고 입을 갔다댄채 꿀꺽 꿀꺽 삼켰다.

“얼마나 웃긴지 알아요? 어차피 알게 될겁니다. 동이트면 우리 모두 알게 되는거예요 내가 얼마나 병신인지 그렇게 천사같은 여자를 두고 차… 잠에서 깨어보니 나는 그런 천사같은 여자를 두고 바람을 피고 도망갈 궁리나 하는 쓰레기더군요 어떤건지 알아요? 뭐 이런 지랄같은 놈이 있을까요 도대체 왜! 왜! 왜!”

나는 술병을 집어던졌고 날칼로운 소리와 함께 깨져 파편이 나뒹굴었다.

“두번째 기회를 원하는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그냥 다시 시작한다 생각했어요 내 한심하고 지랄같은 운명에 한번이라도 정말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살고 싶었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고 싶었고 더이상 구역질 나는 거짓말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어요 여기라면 그렇게 될줄 알았는데.  제기랄 나는 이런걸 원한게 아니예요”

울분을 토하듯 소리쳤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게 불어와서 이제는 벽이 흔들렸다.

머릿속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지나갔다. 덩치큰 사모아인 같은 숙모와 멋들어진 양복의 신사, 나를 보며 욕했던 어린아이와 악마처럼 보이던 신디 그리고 사랑한다 말하는 에이미

갑작스레 답답해진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나는 진짜 이런걸 원하는게 아니예요. 내가 원하는건 이런게 아니었어요 나는 그냥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쥔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와 멈출줄을 몰랐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나무판자로 얽힌 지붕이 금방이라도 날라갈것같이 들썩거렸다. 퍼붓는듯이 쏟아지는 비는 이제 천장 사이로 떨어져 바닥을 흠뻑 적셔놓았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남았네”

노인의 말에 창밖을 보자 번개로 번쩍이는 밖에 여전히 어둡지만 새벽이 오고 있다는걸 알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영감님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의 힘없는 물음을 그가 대답할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까스로 쓰러진 테이블을 집고 일어서서 천천히 그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고개를 털어맸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한숨을 크게 내쉰뒤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어떤걸 말이지?”

노인이 물었다.


“이런 생활이요. 이제 그만해야 겠습니다. 이제 저곳으로 가서 얘기를 해야 겠네요 아니 어쩌면 신디가 모든걸 다 말했겠네요 동이 텄으니 내가 더 말할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러면 그냥 미안하다고 해야 겠네요.   

나는 일어서서 흔들거리는 문을 열었다.


“끝날수도 있네”

노인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멈춰 섰다

“뭐가요? 이 개같은 내인생이? 하.. 어쩌면 그게 더 편하겠네요 저기 산속으로 들어가서 동굴속에 썩어있다가 다 잊혀갈때쯤 멀리 떠나렵니다.”


휘몰아치는 바람은 한발 한발 옮기기 힘들게 만들었다. 잔뜩 힘주고 걷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날라가버릴것 같았다.

천둥소리가 울려퍼지고 빗줄기는 시야까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집앞에 거의 다 다닿았을때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가방 두개를 양손에 든채 폭풍속에서 머리칼을 흩날리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 가냘픈 몸이 에이미 라는걸 깨달았을때 그녀는 이미 내 코앞까지 다가와 가방을 든채로 내게 애원하듯 말했다.

“도망가자”


“에이미..”


“도망가자”


“무슨말 하는거야..”


“지금 떠나면 멀리 갈수 있어”


“에이미”

나는 그녀를 다그치듯 불렀다.


“제발 지금 떠나자 아무말도 하지말고”

그녀는 나를 재촉하듯 뒤로 돌아서서 뛰려 했고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가방은 진흙  웅덩이가 생긴 땅바닥에 떨어져 금새 빗물에 젖어버렸다.


“지금 가야돼 지금가야돼”

그녀는 같은말만 반복하며 가방을 집으려 했고 나는 그녀의 팔을 잡은채 일으켜세우려 버텼다.


“그만해 에이미. 그럴수 없어 미안해”


“아냐 괜찮아 빨리 떠나야돼”


“정말… 미안해 사실..”


“알아!”

그녀가 소리지르며 멈춰섰다.

나는 팔을 놓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알아.. 신디랑 그런것도 다 알아”


“뭐,,라구?”


“알아.. 알아도 괜찮으니까 도망가자 괜찮아. 나는 괜찮으니까 저기로 들어가지말고 나랑 같이 떠나 제발 부탁이야”


“그걸 알고 있었어?”

나의 되물음에 그녀는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문채로 울먹거리며 주저앉을것 같은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그녀는 터질것 같은 울음을 어떻게든 잡아보려 내손을 꽉 쥐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괜찮아.. 내가 더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더 이쁘게 하고 다니고 더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어 내가 안예뻐서 내가 매력이 없어서 그러니까 ”

그녀는 이제 애원하듯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울컥하면서 알수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어째서 이런 여자를 두고 쓰레기 처럼 살았던 것인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하염없이 분노가 치밀고 굳게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려왔다.

“넌 도대체.. 도대체 왜 이런 나를 왜 이런 병신같은 나를...”


“내가 잘못했어 내가 더 잘할께 미안해 자기가 좋아하는거 내가 할께 가지마 나랑 같이 도망가자 내가 정말 잘할께 더 사랑하게 내가 노력할께 바라는거 없이 정말..”

애원하며 울고 있는 그녀는 내팔에 매달린채 힘없이 풀려버린 다리로 털썩 주저앉았다.


“미안해”

나는 그녀를 붙들고 문을 열었다.

모두가 거실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숙모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에이미를 부축이고 쇼파에 앉혔다.


나는 모두를 한번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변명 같은거 할 생각없습니다. 들으신 대로예요 글쎄… 나는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내가 했던 행동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옥에나 가버릴”

한 사람이 욕을 내뱉자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 하고 닥치는대로 내게 집어 던지기 시작했고 에이미는 두손에 얼굴을 파묻은채 큰소리로 울고 있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에서 피가 흘르기 시작했다.


“그만해!”

숙모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람들은 씩씩 거리며 나를 보고 욕을 던지고는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채 서성거렸다.

“더 할말있니?”

숙모가 말했다.


고개를 숙이며 흐르는 피를 닦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무슨말을 한들 제가 한짓이 씻기지 않기 때문에… 정말 죄송합니다. 더 볼 면목이 없어서 이만 떠나겠습니다. 제 남은 기억에 계신 숙모님과 삼촌.. 그리고 할아버지 께도 정말 죄송합니다..”

일순간 집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뭔가 또 일어날 것인가 날아오는게 아닐까 생각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마치 귀신을 본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말이 뭔가 잘못된것인가 하고 어리둥절 하고 있는새에 구석에 눈을 감고 있던 할머니가 일어서서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숙모는 이내 할머니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고개를 흔들며 내게 당장 사라지라는듯 손짓을 했다.


“할아버지….?”

에이미는 어느새 일어서서 나를 보고 놀란표정으로 서있었고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걸 깨닫고 벽에 걸려있는 가족 사진에서 노인을 찾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람들이 경악하고 두손을 모으며 기도를 하더니 자리에 앉기도 하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듯 나를 보고 욕을 해댔다. 나는 무슨일인지 전혀 모르는채 무엇이 실수였던건가를 되새겼다.


에이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어..”


그녀의 말에 나는 주춤거리며 벽에 기대 섰다.

일순간 머리속이 핑핑 도는것처럼 느껴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방금전까지 해변에서 얘기를 나눴던 노인이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는 말은 머리속을 깨질듯한 두통과 함께 속을 뒤집어 놓았다.

헛구역질이 올라와 고개를 숙이고 벽을 집은채로  버텼다.

사람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와 달렸다. 천둥 번개가 내리치고 빗물에 미끄러져 넘어져도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렸다.

폭풍에 금방 날아갈듯한 바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누구야.”

나는 구석에 여전히 앉아 있는 노인을 보며 말했다.

노인은 파이프를 입에 문채 연기를 몇번 뿜어내고 감았던 두눈을 떴다.


“당신 뭐야”

나는 몰아부치듯 물었다.


“이제 다했나”

노인이 말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말 하지말고 당신 누구냐고”

나는 소리쳤고 천둥소리가 지천에 울렸다.

그는 파이프를 입에서 떼고 연기를 내뿜은채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당신 누구길래!”


“그게 중요한가?”


“뭐?


“이제 끝내도 되는건가?”


“뭘 말하는거지?”


“여기 이곳들 이제 끝내도 되는건가?”


“이게….”

눈앞에 캄캄해졌다.


“자네 선택이었어”


“이게 나의 선택이라고?”

나의 말에 노인은 손목을 올려다 보며 마치 손목시계를 보듯 시간을 읽는것 같이 행동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 앉았다. 천둥 이나 바람소리는 더이상 귓가에 울리지 않았다. 온세상이 멈춘것처럼 나를 감싸는 모든것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안으로 부터 심장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았다.


“왜 처음부터 말해주지 않았지?”

나의 물음에 노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선...선택이라면 다른 하나는 뭐였지?”


노인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담배를 한번 더 빨아들였다.

“글쎄.. 그대로 여길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자네 하기에 달렸겠지”


순간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천둥소리와 빗소리가 섞여있지만 에이미라는걸 알아챌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문을 나서자 마자 무언가에 부딪혀 고꾸라졌다.

눈앞이 아득하게 흐려지고 귓가에 에이미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를 잡고 있는것은 힘이 잔뜩 들어간 사람의 손이었고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을때 이미 움켜쥐어 있는 손에 시퍼런 칼날이 배속 깊숙이 들어가 박혔다.

붉은 머리결이 얼굴을 가리면서 덜덜 떨며 칼을 놓고 뒤로 물러서던 신디는 번개가 번쩍이는 해변을 따라 뛰어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움켜쥔 배에 따뜻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뭉개 쓰러졌을때 에이미가 달려와 나를 안고 바 안쪽으로 끌어당겨서 바닥에 눕히고는 무릎꿇고 앉아 내 머리를 품에 안은채 온몸을 떨었다.


귓속에 웅얼거리는 소리가 터널안에 들어온것처럼 울려퍼졌다.

그녀는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시선을 맞추고 나를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에이미….”

쿨럭 거리는 기침속에 비릿내가 섞여 나왔다.

눈 앞이 점점 회색빛으로 어두워 졌다.

빗방울이 얼굴을 적시는지 그녀의 눈물인지 모를정도로 감각이 무뎌졌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춥게 느껴졌다. 축축하고 딱딱한 나무 바닥에 빨려들어가는것 같다.

눈이 감겼다.


- 6 -


눈앞이 캄캄하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천둥소리도 빗소리도 에이미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마치 세상의 소리를 꺼버린듯한 고요함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온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손이 있는지 발이 있는지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점차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영원히 어둠속에 있는것인가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에 느껴지지 않는 손발에 힘을 실어 힘껏 들춰보았다.


어둠속에서 하얀 불빛이 뿌옇게 번져 보인다.

그래 저기로 가면 되겠다 싶어 만져보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다시 한번 온힘을 다해 빛을 향해 몸을 던졌다.


‘커헉’

나는 눈부신 방에서 고개를 내린채 몸안속부터 물을 토해냈다.

여기저기 간호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흔들리는 시야가 제쳐지더니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를 붙들었다.


다급한 목소리와 기계음들 천장의 하얀 조명은 내가 병원에 있다는것을 깨닫게 했다.

울렁거리는 속에 다시한번 구역질이 나오니 그들은 나를 엎드리게 한다음 양동이에 모든것을 개워내게 만들었다.

눈물이 핑돌고 정신없이 쏟아냈다.


온몸이 덜덜 떨리면서 손발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바로 눕히고 팔과 다리를 잡더니 주사를 놓았다.


희미한 시야 사이로 데니얼과 페기가 나를 향해 뛰어오며 내이름을 부르는게 들렸다.


“데니얼 페기?”

그들은 내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안돼 이대로 끝나면 안돼”

나의 말에 데니얼은 정신 차리라는듯이 나를 붙들었다.


“할말이 있어 나를 다시 돌려보내줘 데니얼”

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눈이 감겼다.


얼마나 됐을까


향긋한 데이지 향이 내코를 간지럽히고 축축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


에이미가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고 그 뒤로 노인이 서서 나를 한번 보고는 손목을 가리키고 말했다.

“얼마 없네”

노인은 사라지고 나무판자 지붕이 폭풍에 날라가며 얼기설기 엮인 벽이 쓰러졌다.

멀리 언덕에 있던 집이 산산히 부서지면서 민들레 씨가 날리듯 날아가고 있었다.

하늘엔 커다란 구멍 하나가 온세상을 집어 삼킬듯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에이미”

내가 부르는 소리에 에이미는 깜짝 놀라며 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에이미!”

내가 한번 더부르자 그녀는 내 얼굴을 부여잡고 키스를 하며 울음을 다시 터트렸다.


“에이미 이럴 시간이 없어”


“괜찮아?! 괜찮은거야?”


“에이미 나 다시 가야돼”


“무슨 말하는거야”


“시간이 정말 없어  에이미 여기 어떻게 오면돼”

내가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흔들고 있을때 휘몰아치는 바람이 이제는 바의 벽을 다 부수고 테이블과 의자를 하늘 높이 띄웠다.

“우리 가자 떠나자 여기 있으면 안돼”

그녀는 집어살킬듯 부는 바람을 두려운 눈빛으로 일어서려 했다.


“에이미 여기 어떻게 오면 돼”

나는 다그치듯 소리쳤다.


“일어나 빨리 일어나야돼”

그녀가 나를 부축하듯 일으키려 했다.


“아니야 소용없어 빨리 여기 여기가 어디냐고!”


“왜그래”


“어디야 여기가 내가 꼭 찾아올께”


“여기서 나가야 된다구”


나를 일으켜 세우려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고 얼굴을 보며 소리쳤다.

“내 이름이 뭐야?”


“뭐?”


“내 이름이 뭐냐구”


“갑자기 무슨소리야”

그녀는 천둥소리에 움찔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에이미 내 이름이 뭐냐구”


그녀는 그런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소리 나질 않았다.

입을 열고 뭔가를 말하는데도 한순간에 벙어리가 된것처럼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하며 소리치듯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았다.

“왜.. 왜이러지”

그녀의 다른말은 들렸지만 내이름을 말하는 목소리만은 나오지 않았고 공포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그녀는 내게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를 꼭 부여잡고 있던 손에 점점 힘이 빠져 가는걸 느꼈다.

차가운 바닥으로 힘없이 누웠다.

점점 표정없이 창백해지는 내 얼굴을 그녀는 부여잡았다.

어떻게든 이름을 불러보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덜덜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올려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뭔가를 말하고 있지만 바람소리에 묻혀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꼭 껴안고 귀에 속삭였다.


“나를 꼭 찾아줘요”


- 7 -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 눈을 떴다.

하얀 천장과 하얀색 형광등이 보였다.

한참을 멍하니 보며 어딘지 가늠하고 눈을 껌뻑였다.


“깼냐”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데니얼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앉아 있었다.


“여긴 어디지?”


“병원이지 어디야 지랄 맞은 새끼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정돈했다.


“어떻게 여기가…”


“궁상맞은 새끼 내가 전화 한다고 했잖아”

그는 약간 화가 나있는것 같았다.

울그락 불그락 하는 얼굴로 벌떡일어나더니 병실을 나갔다.


“걱정 많이 했었어..”

어느새 다가온  페기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내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던 이야기 그리고 전화를 받지 않아 집으로 찾아온 데니얼과 페기가 나를 발견하고 911에 전화했지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가까스로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옮긴 얘기를 들었다.


데니얼이 돌아와서 창밖만 보고 앉아있을때 페기는 잠시 자리를 비웠고 나는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뭐?”


“사실 할말이 있어”

데니얼이 천천히 내 옆에 앉았고 나는 그동안에 술을 마시러 다녔던 이야기와 그의 이름을 썻던 과거를 하나둘씩 들려주었다. 아무 말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그를 보며 어떤 심한말이라도 듣길 각오하며 말을 마쳤다.


“와우…”

그는 내말이 끝나자 마자 매우 놀랍다는듯 나를 쳐다보았다.


“응?”


“와~~우 죽이는데?”


“뭐라고?”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내가 엄청나게 여자를 꼬시고 다녔다는 얘기잖아”

나는 그의 예상치 못한 말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가만히 생각하는듯 하더니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입술을 쌜죽거렸다.

“딴건 모르겠고 니가 그렇게 술을 잘마신다는게 놀랍다”


“미안하다 데니얼”


“그래? 그럼 지금까지 여자들한테 산 술을 나한테 사라 그럼 봐주마”

그는 내 옆구리를 가볍게 치고 일어났다.


의사들이 찾아왔고 나는 몇가지 검사를 한후 별 이상이 없어 퇴원 수속을 밟았다.

병원을 나와 데니얼의 차를 타고 가다 문득 거리에 반짝이는 트리를 보고 물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야?”


“그래 너때문에 우리 크리스마스 다 망쳤다”

데니얼의 장난섞인 말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아참 이거”

데니얼이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네 내게 건냈다.


“이게 뭐야?”


“ 너 쓰러졌을때 차 얻어탄 분인데 한번쯤 들려봐”

그의 말에 나는 쪽지를 펴서 주소를 확인했다.


“여기서 가까운거 같은데?”


“그랬나?”


“나 좀 내려 줄래?”


“뭐?”

데니얼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고 페기는 그런 데니얼에게 운전중에 뒤를 돌아본다며 잔소리를 했다.


“여기 바로 앞인거 같은데 인사 좀 드리고 가려고”


“크리스마스 인데? 진심이야?”


“응”


“내일 가도 늦지 않을꺼야”


“아니 바람 좀 쐬고 싶어”

나의 말에 데니얼은 나를 두어번 더 돌아보더니 천천히 차를 세웠다.

나는 차문을 닫고 그들에게 손을 흔든후 코트를 여민채로 걸었다.


반짝이는 트리로 장식된 집들 사이로 캐롤이 흘러나왔고 나도 모르게 따라불렀다.

눈이 내렸지만 춥지 않았고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여기인가”

어느새 아기자기한 장식으로 꾸며진 정원이 있는 집앞에 도착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문앞에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소란스러운 집안에 문이 열렸다.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한분이 나를 맞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기가 루이스씨 댁인가요?”


“맞습니다만…”


“아.. 제가 오늘 병원에서”


“아! 닥터루이스!”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퀴즈를 알아맞히듯 내가 찾고 있는 정답을 말했다.

“네 맞습니다.”


“이런 일단 날씨가 쌀쌀하니 들어오게”

나는 괜찮다며 거부할세도 없이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안으로 들어갔다.

소박하게 꾸며진 집안이 몇대에 걸쳐 살았는지 가늠이 될만큼 여기저기 손때가 묻어있었다.


“어? 자네는?”

낯설지 않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버스에서 만났던 바비라는 할아버지가 서있었다.


“아….”

나는 순간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 쪽지를 꺼냈다. 버스에서 받은 쪽지와 데니얼이 전해준 쪽지의 주소가 같은걸 보고 어안이 벙벙해진채로 서있었다.


“어서오게 안그래도 자네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온건”


“닥터루이스”

할머니는 내 몫인것 같은 차를 내놓으며 말했다.


“맙소사 그럼 자네가…..엄청난 인연이로구만”

바비는 쇼파에 앉으며 말했다.


“네?”


“우리 막내딸일세 허허허허”


“아.. 그럼 여기 안계신건가요?”


“아니아니야 이제 올때가 다 됐는데 일단 앉게 이런 인연도 없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인것 같구만”


나는 그의 호의에 어색해하며 의자에 앉았다.

트리 옆에 옹기 종기 모여있는 가족들이 짐짓 10명이 넘는걸 보니 정말 대가족인것 같았다.

어린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 손을 흔들어주니 엄마 아빠에게 안겨서 나를 빼꼼히 쳐다보았다.


‘띵동’

하고 벨이 울리고 아이들이 우당탕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한동안 현관앞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고 바비는 일어서서 맞이했다.


“어서오게~ 우리 닥터루이스”


나는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며 차를 조금씩 마시다가 내려놓았다.


“인사해 우리 막내딸이네 이 청년이 아까 너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구나”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았다.


“안녕하세요 에이미 입니다.”

그녀가 손을 내민채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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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우리의 상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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