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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 나무를 심으며
사랑이란
나를 너만큼
파내는 일
그 자리에
너를
꾹 눌러 심는 일
엄재국, 찌그러진 밥통
북경 반점 철가방이 길 한가운데 나뒹굴었다
지고 있는 낙엽과 슬쩍 부딪쳤을 뿐인데
멀리 북경에서 문경 흥덕동 뒷골목까지 튕겨졌다
자장면이 중앙선을 침범하고
짬뽕 국물을 신호등 건너 안경점 까지 튀겼던 열아홉 살 배달부
살아오면서 세상을 한번 이렇게 뒤집어엎긴 처음이었다
길가 수북이 쌓인 낙엽들은 속수무책이었지만
아스팔트 위 눈빛 범벅의 면발을 묵묵히 긁어 담는 배달부
그렇지, 밥통 뒤집어지면 세상 못할 게 없지
먼 훗날
저 찌그러진 철가방에서 나뭇잎은 돋을 것이다
아스팔트 깊게 뿌리 내린 쫄깃한 면발이
가지를 뻗고 싹이 나고 꽃 피울 것이다
새들은 면발을 늘려 집을 짓고 새끼를 칠 것이다
그 날갯짓에 낙엽은 또 지고 오토바이는 넘어지고
찌그러진 밥통은 그렇게 천천히 펴질 것이다
이성복, 서시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서경온, 목숨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겐 보입니다
하루살이의 춤
사금파리의 눈물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은 봅니다
웅덩이 물거울에
흘러가는 구름 몇 점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만 봅니다
순하게 밟히고 쉽게 뽑히는
벽돌공장 빈터에 무성한 풀들
오세영, 일몰
온종일 지구를 끌다가
저물녘
지평선에 누워 비로소
안식에 든 산맥
하루의 노역을 마치고
평화롭게
짚 바닥에 쓰러져 홀로 되새김질하는
소 잔등의
처연하게 부드러운 능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