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호, 파 할머니와 성경책
추석 대목 지나 발걸음
한산한
돈암동 시장 골목길
느른한 정적이 감도는 하오
검은 가죽 표지
성경책 바로 옆에 펼쳐 놓고
파뿌리처럼 쓰러져 잠든 할머니
대문짝 활자가
돋보기안경에 넘칠 만큼 가득해
앙상한 팔다리 웅크린
할머니, 하늘의 품에
안겨, 기도하다 잠든 아기처럼 포근하다
이재무, 수평선
수평은 고요가 아니다
수평은 정지가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라
선 안팎 넘나들며 밀려갔다
밀려오는 격렬한 몸짓
소리 없이 포효하는 함성을
저, 잔잔한 수평 안에는
우리가 어림할 수 없는
천연의 본성이 칼날을 숨긴 채
숨, 고르고 있는 것이다
저 들끓는 정지와 고요가
바깥으로 돌출하는 날
수평은 날카롭게 찢어지리라
제 속 들키지 않으려
칼날의 숨 재우고 있는
저 온화한 인품의
오랜 침묵이 나는 두렵다
이화은, 귀를 먹다
널찍한 바위 등에 앉아
토란대를 벗기는 할머니
껍질을 벗긴 토란대를 가지런히 눕히고
웅얼웅얼
낯선 나라의 자장가인 듯 방금
토란대들이 가을볕을 덮고 고요하다
"할머니 금년에 몇이세요?"
지나가던 누군가가 물었지만 또 물었지만 꿈쩍 않으신다
" 귀를 잡수셨나? " 귀를 먹다니
칼을 든 손등도 한 덩어리 뭉쳐놓은 얼굴도
모두 깔고 앉은 바위 때깔이다
바위와 한 통속이다
우물우물 귀를 먹으며 한오백년 걸어와
훌쩍 바위 위에 올라앉은 할머니
귀를 다 먹어야 바위가 될 수 있다고 누가 귀띔했을까
더운 볕을 걷어차고 잠든 토란대 옆에
꾸벅꾸벅 귀 없는 할머니 졸고 계시다
피붙이인 양 늙은 바위가
할머니와 토란대를 등에 업어 재우는
무섭도록 고요한 가을 한 채
김미윤, 사랑과 미움
사랑은 밤에
이불만 덮혀주는 게 아니다
과거도 덮어주고 상처도 덮어준다
미움은 밤에
이불만 걷어차는 게 아니다
추억도 걷어차고 연민도 걷어찬다
마지막 한 걸음은 늘 홀로 걷는 법
아, 그리도 메울 수 없는
사랑과 미움의 간격이여
조인선, 가지치기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생각이 길면 일이 안 된다
가위와 톱을 들고 한 바퀴 돌아보고
큰 가지를 잘라낸다 지난해
바람에 찢어진 가지가 말라 있다
너무 가까워도 볼 수가 없어
꽃눈이 온 자리의 간격을 확인하고
웃자란 곁가지와 잔가지를 쳐낸다
빛은 어느 곳이든 드나들 수 있지만
바람이 통하는 공간 확보도 중요하다
돌아보니 마음을 비운다고
밑둥까지 자를 순 없지 않은가
사랑한다고 꽃눈마다 열매 달 수도 없다
달콤한 열매 하나 제대로 먹으려면
거름부터 주어야 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내 마음에 나무 한 그루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