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항상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걸 좋아했다.
게임보다는 사람들과의 합숙을 하고 싶어서 프로게이머를 했다면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아무래도 사람을 좋아해 매일 모임을 즐기셨던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하다. (그 스타일 못 버리고 아예 비영리단체를 직접 만들어 활동하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렇기에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과 잠시도 떨어지기 싫어했다. 특히 연말마다 찾아오는 고독함과 이로 인한 우울증은 도저히 떼낼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공허함을 느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다.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혼자인듯한 공허한 기분'
이를 한 번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 것이다. 그나마 해결책이라고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수밖에 없었기에 항상 비슷한 감정 노동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나는 몸이 피곤할지라도 매번 약속을 잡았다. 약속이 끝나고 귀갓길 새벽의 공허함조차 싫었던 탓에 졸린 눈 비벼가며 해 뜰 때까지 사람들을 붙잡고 있던 게 불과 얼마 전까지 나의 일상이었다. 자연스레 연애도 항상 갈망했다. 솔로라는 타이틀은 나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기에 연애를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성숙한 연애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수 십 년을 타인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항상 타인의 눈치를 보게 되었고 행여나 그들이 떠날까 봐 두려움 속에 살았다. 혹여나 누군가가 사라지면 새로운 사람을 찾아 그 빈자리에 채워 넣었다.
그러던 중, 작년 겨울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그제야 평소 내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크게 의지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연애나 친구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채울 수 없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서른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나의 인생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영원히 대체할 수 없는 대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탓에 두려움에 빠진 나는 한동안 크게 방황했다. 다행히 지인들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날 수 있었고, 뒤늦게나마 홀로 살아가는 방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가만 보면 각자 자신만의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느낌이다. 망망대해에 홀로 덩그러니 놓여있을 지라도 스스로 노를 저을 수 있다면 폭풍우가 올지라도 헤쳐갈 수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 의존하던 사람이 홀로 남겨진다면 평온한 바다일지라도 매 순간 불안할 것이다. 그러다 큰 폭풍우라도 몰아 친다면 그대로 침몰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
살면서 매 순간 생겨나는 이러한 역경을 혼자 감내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의지하던 대상이 사라질지라도 금세 일어설 수 있으며 타인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오죽하면 니체가 "남의 시선에 신경 쓰고, 평가에 민감한 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노예근성 때문"이라는 말까지 했겠는가. 개인이 타인에게 얼마나 크게 영향을 받는지를 제대로 꼬집은 것이다. 타인의 사랑과 평가에 기대기 이전에 개인의 주체성 확립이 제일 중요한 이유다.
오늘 밤, 친한 친구가 추천해준 <하우 투 비 싱글>이라는 영화를 봐야겠다.
연애하면서 타인에게 의지하는 버릇을 못 고치던 사람이 홀로 서는 방법을 배워가는 과정이 담긴 영화라고 한다. 얼마 전까지의 나처럼 항상 타인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다만 이렇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기분, 아주 어렴풋한 그 느낌만 조금 알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