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호,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는
송사리가 뛰어올랐다 내려앉은
수면이 파르르 떨린다, 소심한
물낯을 흔드는 것은 물고기를 놓친
허공의 자책, 처음 온 곳으로 햇빛을 되돌려 보내는
비늘의 매끄러운 살결에 정신을 놓아버린
바람의 한숨, 조그만 동심원을 그리며
가라앉는 작은 물고기가 사실은
허공의 전부이고 바람의 온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 고요하던 수면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은
너와 나, 너의 순간이 나의 순간 위에
지나온 시간의 무게를 얹었기 때문, 잔잔한
물의 낯에 한 겹 한 겹 지문을 새기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기 때문
이만섭, 꽃들
“꽃들”이란 말
이 아름다운 낱말 속에 숨어 있는 이름들을
낱낱이 호명하지 못하고
그냥 꽃들이라는 단음절어로 부를 때
그 지순한 꽃의 마음을 생각하면
왠지 무성의한 것은 아닌지 나는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내 먼저 친숙한 말인 듯 “꽃들”이라고 부르는
이 흔연스러운 기쁨을 어쩌랴
우리의 일상은 나무도 돌멩이도 앞 냇가도
비로소 꽃들로부터 환해진다
그 섬약한 손길이 닿지 못할 때
햇빛은 어떻게 나무의 열매를 지을 것이며
바람은 무슨 흥으로 불어올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이 좁혀지고
그 눈빛마다 생기가 도는 것도
꽃들이 완충지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산자락 휘감아 아름 동인 푸름과
강물에 물줄기 건네준 골짜기의 시원에 이르기까지
꽃들의 의미는 닿아 있다
샘이 솟고 새가 노래하는 이유가
꽃들이 피고 지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니
저 어두운 밤을 달려 다다른 아침
가슴을 깨우는 강물이여
말간 낯으로 피어난 꽃들이 눈부시다
나호열, 약속
먼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다시 먼 길을 돌아가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그의 신발에 입맞춤 하겠네
힘든 오르막길이었으니
가는 길은 쉬엄쉬엄 내리막길이라고
손 흔들어 주겠네
지키지 못할 것이기에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기에
약속은 사전에 있는 것이네
그대가 왔던 길을 내가 갈 수는 없으니
돌아가는 것도 그대의 수고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서운할까
그래도 보일락 말락 그만큼 거리에서
그대에게 할 말이 있네
들릴락 말락
꽃이 피었네
정병근, 나쁜 소문
내 피 속에는 나쁜 소문이 들어있다
누군가를 저질렀거나 겁탈했다는
소문은 밤새 몸을 떠돌다가
아침에 시퍼런 멍 자국을 남긴다
소문이 다녀간 몸은 상처투성이다
지난밤, 나쁜 소문에 휘말린 나는
누군가와 엉겨 붙어 싸우다가
코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밤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저희들끼리 소곤대다가 내 앞에서 뚝 그치는
돌아서면 다시 소곤소곤
귀에서 귀로 번지는 은밀한 파문의
종잡을 수 없는 배후가 궁금하여
긁어도 긁어도 시원치 않은
나를 그라고 부르는 소문 하나
내 피 속에 파다하다
박주택, 하루
옷아, 너도 힘드니까 쉬어라
바람에 쓰러지지 않으려
뿌리를 깊게 내리는 날
구두야, 너도 애썼다
네가 찍은 무수한 발자국으로
오늘을 이루었다
별이 꽃으로 돋는 밤
거친 파도를 헤치며 먼 곳으로
가는 배를 떠올린다
아침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