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나무의 기척
댓돌에 한 발 올려놓고
헌 신발 끈 조여 매는데
툭
등 위로 스치는 손길
여름내 풍성했던 후박나무 잎
커다란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가을 나무의 기척
이윤학, 복숭아꽃 핀 언덕
나는 내가 아니었음 싶다
나는 내가 없는 곳으로 가서
나랑 만나 살고 싶다
복숭아꽃 핀 언덕을 넘어가고 싶다
복숭아꽃 피는 언덕으로 가고 싶다
천양희, 입
환각거미는 입에다 제 알집을 물고 다닌다는데
시크리드 물고기는 입에다 제 새끼를 미소처럼 머금고 있다는데
나는 입으로 온갖 업을 저지르네
말이 망치가 되어 뒤통수를 칠 때 무심한
한 마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때 입은
얼마나 무서운 구멍인가
흰띠거품벌레는 입에다 울음을 삼킨다는데
황새는 입에 울대가 없어 울지도 못한다는데
나는 입으로 온갖 비명을 내지르네
입이 철문이 되어 침묵할 때 나도
모르는 것을 나도 모르게 고백할 때 입은
얼마나 끔찍한 소용돌이인가
때로 말이 화근이라는 걸 일러주는 입
입에다 말을 새끼처럼 머금고 싶네
말없이 말도 없이
허수경,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나비를 보았네
저녁에 흙을 부드럽게 만져
막 나오는 달리아를 편하게 하려다가
나비를 보았네
나비가 날아가는 곳을 멍하니 보는데
턱 허니 의젓하게 차오르는 눈물
언제부터인가
야간등을 단 밤하늘의 비행기를 보면
무슨 이 지상에서 살아남을 권리이듯
눈물이 의젓하게 차올랐네
저 안에 마늘쪽같이 아린 집이 있어
야간등을 달고 나비들은 그 곁을 지나는지도 모른다
나비가 저녁 햇살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잠자리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네
여린 빛마저
울음 오므리듯 투과하는 날개를 가져서
어떡할 것인가
도종환, 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 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 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 짝을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내게 그것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가죽나무일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