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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탄, 옮겨 앉지 않는 새
우리 여름은 항상 푸르고
새들은 그 안에 가득하다
새가 없던 나뭇가지 위에
세가 와서 앉고
새가 와서 앉던 자리에도 새가 와서 앉는다
한 마리 새가 한 나뭇가지에 앉아서
한 나무가 다할 때까지 앉아 있는 새를
이따금 마음속에 본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앉지 않는 한 마리의 새
보였다. 보였다 하는 새
그 새는 이미 나뭇잎이 되어 있는 것일까
그 새는 이미 나뭇가지일까
그 새는 나의 언어(言語)를 모이로
아침 해를 맞으며 산다
옮겨 앉지 않는 새가
고독의 문(門)에서 나를 보고 있다
최승호, 수평선
땅을 배고 하늘 보던
미륵의 돌뺨이
발그스름해지는 황혼 무렵에
와불(臥佛)이 발을 뻗은 저쪽
긴 수평선은
잔광을 번쩍거리는 큰 칼처럼 누워 있을까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고
우리가 사라진 뒤에 존재하는 것
수평선은 하나의 불사신의 시선이다
우리는 한계 속에 살다 무한 속에 죽을 것이다
그러면 좀 억울하지 않은가
우리는 무한을 누리다 한계 속에 죽을 것이다
박용재, 강릉
마음이 먼저 도착하여
한참 동안을 흥분하더라
몸은 더디게 더디게 도착하였으나
마음보다 더 흥분하더라
몸이 말하기를, 맑은 바람꽃 덩어리가
강릉보다 더 좋은 곳이 있더냐
마음이 받아치더라
해당화꽃 한 송이에 흥분할 줄 아는
삶이 어디 그리 흔하더냐
몸이 마음에게 물었다
그렇게 좋으냐고
마음이 그윽하게 답하기를
다 네 덕분이라 하더라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불러도 삼월에는 주인이 없다
동대문 발치에서 풀잎이 비밀에 젖는다
늘 그대로의 길목에서 집으로
우리는 익숙하게 빠져들고
세상 밖의 잠 속으로 내려가고
꿈의 깊은 늪 안에서 너희를 부르지만
애인아 사천 년 하늘빛이 무거워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물에'
우리는 발이 묶인 구름이다
밤마다 복면한 바람이
우리를 불러내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를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우리는 풀지 못한다
김남조, 항구
하세월 표류해 온
나의 일엽편주가
뱃전 스치고 다시 떠나노니
만약에 예서
추운 이를 만나거나
눈매 글썽이는 따뜻한 사람을 알았더라면
나는 기슭에 배를 두고
뭍에 올랐으리라
내 배는
바닷길 만경창파에
흘려 보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