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봄볕
오늘은 탈이 없다
하늘에서 한 온큼 훔쳐내 꽃병에 넣어두고 그 곁서 잠든 바보에게도
밥 생각 없이 종일 배부르다
나를 처음으로 쓰다듬는다
오늘은 사람도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
정윤천, 물방울과 보라색
사랑의 눈망울 속에는 물방울과 보라색이
하나씩 들어 있는 거라네
하루는 들에 나가서
보라색 꽃잎 몇 장 뜯어와 흰 봉투 안에
갈무리했던 일
꽃잎은 말라가면서
자꾸만 배어나오던 보라빛
그러니까, 그것은 가슴에도 멍이 번지는
그런 일이었을 거라네
어느, 수요일의 오후 같은 속으로
느닷없이 한차례 비라도 내리기 시작하면
마땅한 갈 곳 하나 쉬이 떠오르지 않아도
마땅치 않은 그 사이로 벌써, 저 먼저
떼굴떼굴 굴러가버리기 시작했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동그라미의 이름
그러니까 사랑은 물방울과 보라색이
함께 어른거렸던 거라네
김영남, 홍매화
여운만 남은 기관총 소리다
낡은 군복 입은 언덕
짓밟히고 부러지고 퇴각한 흔적들 위에서
기쁜 전향 알리고 싶은 급한 호흡들
네가 그렇게 다가온 적 있다
나도 그런 괴로움 있었다
오늘도 두 눈으로 소곤소곤
귓속말로는 벙글벙글
생동감 감춰져 있는 경구들 말줄임표처럼
할 말을 뒤에 숨겨두자
낯선 관념들은 모자를 씌워두자
어느새 팔다리 머릿속에도
무엇이 다닥다닥 옮아 붙는다
뽕밭 보릿대에서 발견한 저 딱정벌레들
등 뒤로 쏟아지는 샤워기의 냉온 물방울들
견디기 힘든 밤에 눈뜨는 이 욕망 욕망들
서승현, 깻잎
아주 작은 일에도 내 뜻대로 안 된다고
그동안 지내온 시간을 몽땅 날려버릴
결절의 말들이 우두둑거리며 마음을 토막질한다
부글대는 속사정이야
눈치로만 짐작해도 어련하랴만
끝내 내뱉고야 말 극한의 말들은
아직 목울대를 넘어오지 않았다
입술을 비틀며 곧 터져 나올
활활 타는 말의 더미가 갈라진 혓바닥을 압박할 즈음
마주 앉은 밥상 앞에서 불쑥 내미는
싱싱한 야생 깻잎 한 장
화근내 나는 입 안 시원하게 헹구라고
실금 많은 깻잎 같은 푸른 손바닥으로
초록빛 화한 향기 성큼 건넨다
투명하게 뜨겁던 들판의 햇살과
약한 대궁을 끊임없이 흔들던 바람과
목마름을 적셔주던 굵은 빗방울의
갈등 속 시간의 무늬를 각인한 채
나에게 건너온 목숨 한 장
온몸에 새겨진 침묵의 말씀 묵묵히 받아든다
별일 아니라면, 손톱만큼 속상한 일이라면
그저 깻잎에 실금 하나 새기는 양 하라고
들깻잎 향처럼 환한 향 전하는
깬 입이 되라는 깻잎의 충고
한 입 가득 채우는 깔끔한 소멸이
성큼 던지는 후련한 한마디
오늘 하루 깬 입으로 향기롭게 살라
온몸이 으깨지며 가르쳐 준다
이재무, 주름진 거울
거울 속 굵게 팬 주름들 곁
갓 태어난 잔주름들
어느새 일가를 이루었구나
저 굴곡과 요철은
시간의 밀물과 썰물이 만든 것
주름 문장을 읽는다
주름 속에는 눈 내리는 마을이 있고
눈에 거듭 밟히는
윤곽 흐릿한 얼굴이 있고
만지면 촉촉이
손에 습기가 배는 풍금소리가 있다
이마에서 발원한 주름 물결
번져서 온몸을 덮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