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근처를 앓다
어떤 사람의 가슴 한가운데 들지 못하고
그 언저리를 서성이는
호수에 던진 돌멩이가 만드는 파문 같은
근처, 라는 아픈 말
화들짝 물러나
종탑을 바라보며 멀리서 종소리를 앓고
냉가슴의 저녁을 맞고
딱지 않은 새벽을 여는 말
'그곳'이 아닌, 근처
내가 근처를 맴도는 건
발이 오래 전부터 해 오던 깊숙한 얘기
그 얘기는 노래가 되어 발바닥에 못 박히고
바람이 악보처럼 낮고도 뜨거운 상처를 넘길 때
내 가슴에서는 건강한 구름들이 피어나곤 한다
이를테면 뭉게구름 양떼구름 새털구름
그 구름들은 한 번도 웃음을 잃은 적이 없다지
이제 나는 구름의 근처에서 산뜻하게 책장을 넘길 줄 안다
나는 또 무엇의 근처일까
여태천, 유성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나의 기억이 만들어 낸 바로 거기까지
당신이 있다
있다가 없다
백 년의 이별
그렇게 사라지는 이 모든 착란은
기다림 때문이다 그러니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왔다
멀리 가 본 자들만이 오직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안다는데
생의 바깥에서만 안쪽이 필요한 법
계산이 안 나오는 것들이여
눈을 감아도 보이는 어둠이여
1977년의 내 은빛 보이저 1호는 어디쯤 갔을까
백 년쯤 지나면
당신의 끝에 도착할 수 있는 걸까
백 년쯤 멀리 있는 눈이 반짝 빛난다
백 년쯤 후에야
나는 당신과 이별을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백 년이 필요하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문창갑, 죽
죽, 이라는 말 속엔
아픈 사람 하나 들어 있다
참 따뜻한 말
죽, 이라는 말 속엔
아픈 사람보다 더 아픈
죽 만드는 또 한 사람 들어 있다
나호열, 눈물이 시킨 일
한 구절씩 읽어 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만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이재훈, 북극의 진화
툭, 떨어진다, 얼음이다
지구는 돌고, 얼음덩어리는 각을 세운 채
조금씩, 때론 한 웅큼씩
때론 한 마을과 한 세대가 제 몸을 허문다
곶과 곶, 섬과 섬, 만과 만, 길과 길이 허물어진다
지도는 늘 변했다
그 속엔 울음이 있고 해체가 있다
인간의 눈물이 북쪽을 흔든다
언젠가 인간의 시계는 멈추겠지만
얼음의 시간은 멈추지 않겠지
질질 흐르고 흘러
땅을 감싸고, 머금고, 토한다
최초의 물은 멈추지 않고 질퍽대면서
어느새 허벅지까지 올라온다
솔직히 나는 진화했다
물이건, 얼음이건 간에
먹고 버리고 회피하면서 몸뚱이를 지켜왔다
상점에 들어오면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기억을 소환해
이 도시를 담금질한다
한 달 새 교차로엔 거대한 빌딩이 들어섰다
대형 마트와 옷가게가 들어서고 그 위에 사람들이 산다
지도는 또 바뀔 것이다
대륙의 한 점이, 또 한 점이 되고
다시 한 점이 덧입혀져 거대한 점이 될 때까지
저 멀리 철새는 날아오르고
꽃잎은 몽우리를 틔울 것이다
내 숨은 어느 산맥을 따라 이동할까
밤이 되면 지도의 소리는 막힌다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인간의 소리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