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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쑥국
참 염치없는 소망이지만
다음 생애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그대 꼬드겨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그래도 그래도
골목 저편 오는 식솔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 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류정희, 상사화
생각이 달라도 사랑이 되는지
사랑하고 말았다
사랑하면 할수록 생각도 많아졌다
금을 긋고 등을 지고 살아도
붉게 피는 꽃
가는 길 빤히 알면서도 길을 놓치는
그 깊은 바다를 어떻게 건너 왔는지
생각이 달라도 어떻게 나를 열고
들어 왔는지
먼 길 아니어서 돌아와 보면
난데없이 솟구쳐 홀로 꽃으로 선 당신
박노해, 잎으로 살리라
꽃이 아니라
잎으로 돋는다
꽃으로 나서기 보다
잎으로 받쳐 드린다
꽃처럼 피었다 지기 보다
언 땅에 먼저 트고 나중에 지는
나는 잎으로 살리라
푸른 나무 아래서
너는 말하리라
꽃이 아름다웠다고
떨어져 뿌리를 덮으며 나는 말하리라
눈부신 꽃들도 아름답지만
잎이어서 더 푸르른 삶이었다고
서수찬, 그리운 이불
법성포에 오래간만에 돌아온 나를
수천만 번 들여다보았을
물고기 눈동자마저
업신여긴다 싶어 일부러 바닷가 쪽을 피했다
발바닥의 조개껍데기를 닮아 있는
그립던 상처들
살 속 깊이서 아는 체를 한다
얼마나 수혈을 받고 싶었던 땅인가
살 속에서 하나하나 비린내를 건져 내어서
잊어버리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살 속에 닻은 깊이 내려진다는 것을
작아진 고향은 미리
알고 있었나
한눈에 피보다 진하게 누구네 장남 아닌가
알아봤을 때
몰래 숨어드는 난처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나도 흔하디흔한 물고기가 아니라
비로소 사람의 이름을 갖네
뒷덜미를 후려쳐서 내쫓아 버릴 것 같던
법성포의 여러 손길들
해당화처럼 살며시 흔들려 주네
밤새 비린내를 이불로 덮어주는
아버지의 손길이 참 많이 늙어 있었다
고영민, 나이테 속을 걸어
제재소 옆을 지나다가
담 옆에 켜놓은 통나무 하나를 본다
잘린 단면의 나이테가 선명하다
여러 굽이 에돌아 만들어진 나무 속 등고선
해발 몇백 미터의 산을 품고
걸어온 첩첩의 붉은 산길이여
나무는 산정으로 오를수록
점점 몸피와 나이를 줄인다
청명한 공기와 햇빛으로부터
아득히 멀고 먼
걸음을 옮길수록 숨막히고 어두운
나무의 안, 안
가는 실금의 첫 나이테가
제 생의 마지막 등고선
최고의 산봉우리였다네
숨을 고르며 오랫동안 산정에 서 있다가
하산한 나무 한 그루가
뿌리, 제 신고 온 투박하고 낡은 신발을
산속에 벗어놓고
가지런히 누워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