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집, 어떤 사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겁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밤을 헤매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 번 나의 눈을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직이 나는 목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내가 지향 없이 헤매일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를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유병근, 묵화
진눈깨비 틈새로
바다가 오다가 몸을 움츠린다
진눈깨비 틈새로
느닷없이 휘청대는 바다가 있다
진눈깨비 틈새로
느닷없이 사라지는 바다가 있다
진눈깨비 틈새로
사라진 바다가 떠 있다
김사인, 코스모스
누구도 핍박해 본 적이 없는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손기섭, 혹
언제부턴가 내 등에
점점 커가는 콩알만 한 혹 하나가 생겼는데
손이 닿지 않아 만질 수도 없고
거울로 비쳐봐도 잘 보이지도 않고
가끔 가려운 듯하면서 신경을 긁는다
손수 칼 잡을 때 같으면
친구 이리 와 그까짓 것 문제없어
하고 손쉽게 떼어내 줄 것 같은 것이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렇게 해줄 만한 친구 하나 없다
나온 지 오래 됐어도 근무했던 병원에 가면
마음 써줄 후배나 제자도 있겠지만
그 까다로운 수속이며 절차며
어쩔 수 없이 번호가 되어 기다려야 하고
그 밖의 처지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번지도 잘 모르는 곳에서 눈물이 난다
안준철, 한 사람을 위한 시
그 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연일 장맛비가 내리자
그 길은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그 물 속에 난 길을
나는 환히 볼 수 있다
외롭지 않아서 찾아간 길이었다
거기 잃어버린 내가 있었다
그가 먼저 내게 악수를 청했다
저수지가 야윈 등허리를 보이자
물가로 하얀 길이 드러났다
그 길 어디쯤에서
막 울고 난 뒤의 평화 같은
고요함이 나를 찾아왔다
그 길은 지금 물속에 있다
나는 그 길을 환히 볼 수 있다
야윈 뒷모습을 본 사람만이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