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숙, 첫사랑
공사중인 골목길
접근 금지 팻말이 놓여 있다
시멘트 포장을 하고
빙 둘러 줄을 쳐 놓았다
굳어지기 직전
누군가 그 선을 넘어와
한 발을 찍고 지나갔다
너였다
최정란, 여우빵집
오후 다섯 시의 여우빵집은 골목이 활동무대다
아파트와 노을 사이, 지하철역과 퇴근 사이
하얀 요리사 모자를 쓰고
시식용 크림빵을 골목에 내놓는 빵집 주인은
프렌치 자수가 놓인 하얀 포플린 앞치마 밑에
통통한 꼬리를 숨기고 있다
골목을 사로잡은 빵맛의 비법이 꼬리에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이미 사람이 된 지 오래인 그는
더 이상 사람들 앞에 꼬리를 내보이지 않는다
대신 주기적으로
소독차 꽁무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처럼
갓 구운 빵 냄새를 자욱하게 풍긴다
아무리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여우는 여우인데
왜 꼬리 흔들고 싶을 때가 없을라고,
입과 입을 건너가며 소문들 수군거리는 동안
저도 모르게 출출해져서
단팥빵과 곰보빵 봉지를 집어드는 사람들
등 뒤에 꼬리 하나씩 달고 나온다
누구의 뒷모습에서 방금 빠져 나왔는지
보이지 않는 꼬리가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고 있다
빵 냄새는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지고 있다
이동진, 할머니 편지
느그들 보고 싶어 멧 자 적는다
추위에 별 일 없드나
내사 방 따시고
밥 잘 묵으이 걱정 없다
건너말 작은 할배 제사가
멀지 않았다
잊아뿌지 마라
몸들 성커라
돈 멧 닢 보낸다
공책 사라
박후기, 사랑
침묵은
말 없는 거짓말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살아야 하는 여자와
살고 싶은 여자가 다른 것은
연주와 감상의
차이 같은 것
건반 위의 흑백처럼
운명은 반음이
엇갈릴 뿐이고
다시 듣고 싶은 음악은
다시 듣고 싶은
당신의 거짓말이다
이종태, 재회(再會)
어머니
다음 생에서
아니면 몇 억 겁의 후생에서
아침이슬과 들국화가
약속없이 만나듯이
우리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