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3월 26일. 이승만의 83세 생일이었다. 이승만은 생일을 맞아, 가족 한 명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것은 바로 아들. 이승만과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이승만에게는 전처인 박승선 사이에 봉수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미국 체류중에 그만 병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양자로 이기붕의 아들을 지목하여 입적시켰다.
이기붕과 그의 아내 박마리아 사이에는 이화여중 재학 중 요절한 장녀 이강희와 장남 이강석, 차남 이강욱이 있었다. 이승만은 그중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입적시켰다. 당시 이승만의 후계자로 이기붕이 낙점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것이 확실시되었다. 이기붕은 1956년 5월 부통령 선거에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했다가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배하였지만, 그해 제3대 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앞으로 있을 1960년 선거에서 다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 당선이 유력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남까지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자, 이기붕의 서대문 집은 아예 '서대문 경무대'로 불려지게 되었다.
혹자는 83세에 달하는 이승만이 이렇게 양자를 들인 이유를 '왕조 계승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히야시 다께히꼬에 따르면, "이승만, 이기붕의 조상은 모두 이씨 왕조 양녕대군으로 시작되며, 17대 후손인 이승만에 대해 이기붕은 18대 후손이었다. 자식이 없는 이승만은 이기붕의 장남 강석을 양자로 맞아, 늙은 집념에 따라 문자 그대로 이씨 왕조의 재현을 도모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제1인자를 양아버지, 제2인자를 친아버지로 둔 이강석의 위세는 막강했다. 정병준의 책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 소개된 장면을 보자. 이강석은 백주에 정복 차림의 헌병을 구타하고 파출소의 기물을 부수고 다녀도 누구 하나 그를 고발하고 처벌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강석은 이승만의 양자가 된 직후 부정으로 서울대 법대에 편입해 서울대 법대생들이 4월 9일 동맹휴학에 돌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이강석은 서울대 법대를 중퇴하고 육군 사관학교로 재입학하여 12기로 졸업했으며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강석이 제3인자로서 그 권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얼마 후 '가짜 이강석 사건'이 벌어진다. 1957년 8월 21일 오전 6시부터 몰아친 태풍 아그네스가 경북 동해안 일대를 강타해 그 연안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다. 이 지역에 22세의 대구 출신 무직자 강성병이 나타났다. 그는 이강석 행세를 하면서 이 지역의 각급 기관장들을 농락하고 다녔다. 기관장들은 그에게 돈을 주고 아첨을 일삼는 추태를 벌였다.
같은 해 8월 30일 밤에는 강성병이 대뜸 경주경찰서 서장실로 전화를 걸어 "나, 이강석인데…"라고 하자, 경주서장은 화들짝 놀라며 강성병이 기다리는 다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귀하신 몸이 어찌 홀로 오셨나이까." 황송해하며 연방 머리를 조아리던 서장에게 강성병은 "나는 이강석인데 하계 휴가차 진해에 계시는 아버님의 밀명으로 풍수해 상황을 시찰하고 공무원의 비리를 내사하러 왔다. 암행시찰이니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아버님께서 누설자는 엄중히 다스린다고 말씀하셨다. 수재민에게 나누어 줄 쌀을 준비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가짜 이강석은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영천, 경주, 안동, 봉화를 누비며 경찰서장 시장 군수 읍장 은행지점장 등에게 금품을 요구했다.
강준만에 따르면 경주시장은 강성병을 지프에 태워 불국사 관광안내를 하면서 각종 기념품을 사주었다. 각지 경찰서장 등과 36사단장은 경호원을 동승시켜 관용 또는 군용 지프로 목적지까지 가게 했다. 몇몇 경찰서장은 고급 요정이나 관사에서 식사와 술을 대접했다. 당시 공석 중인 치안국 통신과장 승진 운동을 한 사람도 있었고, 야당 탄압과 여당 지원 사실을 보고하면서 "명년에 있는 민의원 선거에 자유당 후보를 꼭 당선시키겠다"고 다짐한 사람도 있었다. 가짜 이강석과 같이 기념사진을 찍거나 그의 숙소 앞에 불침번을 서게 한 사람도 있었다. 뒤늦게 알고 안동에서 의성까지 뒤따라가서 인사를 한 장성도 있었다고 한다.
덜미는 경북지사 이근식이 잡았다. 진짜 이강석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짜 이강석 사건을 심판하는 대구법원에서는 법원 건립 후 최고 인파인 1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판사 전용 출입문까지 들어선 방청객 사이로 법정에 들어가느라 판사의 법복이 찢어지고 법정 안에 있는 의자의 반이 부서졌다. 가짜 이강석은 10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의 법정 발언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돈만 있으면 언제라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세태가 아니냐." "이번 체험을 통해 권력의 힘이 위대한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면 나에게 아첨한 서장, 군수 등은 시국적 간신도배이다." "언젠가 서울에서 이강석이 헌병의 뺨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 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을 보고 한번 흉내내 본 것이며, 권력이 그렇게 좋은 것인 줄 비로소 알았다" (이상 박찬, 임영태의 책에서 발췌)
진짜 이강석은 가짜 이강석 사건 소식을 듣고 격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째서 가짜 이강석이 활개를 치고 다니고, 무려 46만환이나 되는 거금까지 챙길 수 있었던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제3인자로 알려진 진짜 이강석은 법 위에 올라선 무법자였고, 다음 정권을 이어갈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또 하나의 권력이었다. 제3인자의 권력이 이러할진대, 제1인자와 제2인자의 권력과 위세는 오죽하였겠는가. 당시 이승만과 이기붕에게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었고, 또 아무도 대적해서는 안 되었다. 가짜 이강석 사건이 일어난 다음해,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서 김성환 화백이 만화 <고바우 영감>으로 이 사건을 풍자하였다가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시사만화가가 당한 필화 사건이었다.
이강석은 195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포드베닌 보병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마치고 5월 25일 귀국하였다. 그리고 1960년 4월 19일 독재자 이승만에 대해 민중들이 항거한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자, 이틀 뒤 이강석은 경무대에서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 그리고 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쏘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기붕 일가족 자살에 대해서 당시 곽영주가 이승만의 하야를 막기 위해 여론을 무마시키고자 그를 비밀리에 살해했다는 설이 있으나 알 수 없다. 공교롭게도 이강석이 이렇게 자살한 3년 뒤인 1963년, 가짜 이강석 강성병도 자살로 삶을 마무리해 죽음까지도 진짜를 따라가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연이 질겼던 진짜 이강석과 가짜 이강석. 이들이 만들어낸 블랙코미디가 아직까지도 흐릿하게 남아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출처;da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