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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리필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봄은 해마다 새 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영철, 모래알 하나
모래알 하나가 물 위에 떨어진다
동그란 무늬가 물가로 번진다
모래알 하나가 우주 위에 놓인다
동그란 무늬가 우주 속으로 퍼진다
모래알 하나가 땅을 흔들고
동그란 무늬가 우주의 온 공간을 흔든다
오늘은
네가 세상의 중심이다
박칠근, 숯에 대한 단상
잘 만들어진 숯을 쪼개보면
속이 한결같이 까맣다
불 지피고 얼마나 기다리면
소용 있는 숯을 만들 수 있을까
타다 만 장작은 쓰일 데 없고
너무 타버리면 재 되어
다시는 화기를 담지 못한다
양질의 숯 만들려면
아궁이에서 섣불리 분리하면 안 된다
너무 빨리 진화한 것과
진화할 시기를 놓쳐 재가 된 것과
좋은 숯이 되는 것은 순간에 생긴다
아궁이 안의 장작처럼 얽혀
타고 있을 때가 있다, 살다보면 더러
조예근, 내가 나를 배반하고
하루 세끼
우물우물 씹어 먹는 흰 밥덩이만큼이나
두루뭉술하게
나는 나도 모르게
아침에 한 약속 저녁이면 배반하고
그 하얀 거짓말쟁이인 나를
철석 같이 믿는다
내 마음 빈 뜰에 물렁물렁한
쉰 밥덩이 같은 내가
허우적허우적
흐르는 시간의 물속에 물구나무서서
중얼중얼 신이 되라고 나를 부추긴다
칼칼한 아침 느닷없이 서쪽하늘에서 보름달이
하얗게 웃으며 떠오르듯이
그렇게 나는
아침마다 하얀 거짓말쟁이가 된다
류정환, 상처를 만지다
입춘 지나 경칩이면 봄 아니냐고
밖에 내놓은 군자란이 밤새 냉해를 입어
한 잎 끝이 짓무르더니
손쓸 겨를도 없이 마르고 부서졌다
매끈하던 잎에 상처가 생겨
흉한 것을 며칠 들여다보다가
아예 잎 밑동을 잘라버릴까
가위를 들었다 놓기를 거듭하다가
그냥 두기로 하였다
얼룩진 상처도 제 얼굴이려니
감출 수 없어서 눈길을 붙드는
흉터도 제 삶이려니 싶어
성급함을 자책하는 내 상심이
살을 도려내는 아픔보다 더하랴 싶어
그냥 두고 한 번 더
한 번 더 만져주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