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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비출 듯 가린다
어두운 밤길을
작은 등불 하나 비추며 걷는다
흔들리는 불빛에 넘어져
그만 등불이 꺼져 버렸다
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빛나는
밤하늘 별빛을 보았다
언제부터 내 머리 위에서
찬연히 반짝여온 저 별빛
작은 등불을 끄지 않고는
하늘의 별빛을 볼 수 없다
작은 것은 늘 크고 깊은 것을
비출 듯 가리고 서 있으니
김소연, 이별하는 사람처럼
이별하는 사람처럼
할 말을 조용히 입술 안에 가뒀지
비가 왔고
앙상한 나뭇가지 관절마다
물방울들이 반짝였지
크리스마스트리의 오너먼트들처럼
우리는 물방울의 개수를
끝없이 세고 싶었어
이만이천스물셋 이만이천스물넷
나는 조용히 일어나
처음 해보는 것처럼 수족을 움직여
찻물을 끓였고
수저를 달그락거리며
너는 평생 동안 그래온 사람처럼
오래도록 설탕을 녹였지
해가 조금씩 기울었지
베란다의 화분들이
그림자를 조금씩 움직였지
선물처럼 심장에선 무언가를 꺼내니
내 손바닥엔 까만 돌멩이 하나
답례처럼 무언가를 허파에서 꺼내니
네 손바닥엔 하얀 돌멩이
하나
이별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뚱한 돌멩이가 되었지
이수익, 거미
허무한 바람의 벽에
걸어놓은 그 약한 투망도
거미여
네게 그것은 희망이다
오, 생존이다
지나가는 한줄기 바람결에도
경계하는 네 푸른 신경은 떨리어
허약해졌는가, 거미여
태양이 마지막 피를 연소하는
일몰의 거리에서
나는 하루에 받은 인상들을 감광하고
남몰래 밤이면 암실에서
내 영혼의 빛으로 이를 현상한다
나는 나의 과거를 그리고
봄이면 나무에 꽃이 피는 이유를 그리고
우리들의 사생활을 그린다
결국은 나와 결별해야 하는
그 몇 줄의 시를 위하여
나는 투망을 한다
희망도 생존도 될 수 없는
그 몇 줄의 시를 위하여, 거미여
오늘도 나는 아픈 손으로 그물을 짠다
천양희, 한계
새소리 왁자지껄 숲을 깨운다
누워 있던 오솔길이 벌떡 일어서고
놀란 나무들이 가지를 반쯤 공중에 묻고 있다
언제 바람이 다녀 가셨나
바위들이 짧게 흔들 한다
한계령이 어디쯤일까
나는 물끄러미 먼 데 산을 본다
먼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누가 터무니없는 말을 했나
먼 것들은 안 돌아오는 길을 떠난 것이다
이제 떠나는 것도
떠나고 싶은 마음보다 흥미가 없다
내 한계에 내가 질렸다
어떤 생을 넘겨도 동어반복이다
언덕길 오르다 말끝을 흐린다
마음아 그만 내려가자
김완하, 썰물
물 나가서야
섬도 하나의 큰 바위임을 안다
바다 깊이 떠받치고 있는
돌의 힘
인간 세상
발아래 까마득한 벼랑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