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미, 누가 있다
거울에 손을 넣자 손톱이 깨졌다
나는 내가 아닌 것들과 함께
부드러운 것을 만지다 놓쳤다
번개가 치는 날은
거울 속에서 한 번씩 내 손이 나오는 날
분홍타이즈를 신은 아이가 제물 대에 올라가는 날
어머니 신전에 있는 거울이 한순간에 꺼지는 날
저곳
손대기만 해도 깊숙이 열리는 누이
같은 검은 숲
흑백의 코끼리가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볼 때
우리는 한 번쯤 지구로 여행을 가자
그곳에 박제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는 누가 있다
트럭에 실린 거울 속에서
손톱이 혜성처럼 떠다니는 광경
번개가 치는 날은 내가 아닌 것들이 내린다
어디선가 만난 적 있는
낯선 폭우
유치환, 낙화
뉘가 눈이 소리없이 내린다더뇨
이러게 쟁쟁쟁
무수한 종소리 울림하며 내리는 낙화
이 길이었다
손 하나 마주 잡지 못한 채
어짜지 못한 젊음의 안타까운 입김 같은
퍼얼펄 내리는 하아얀 속을
오직 말없이 나란히 걷기만 걷기만 하던
아아 진홍 장미였던가
그리고 너는 가고
무수한 종소리 울림하는 육체 없는 낙화 속을
나만 남아 가노니
뉘가 눈이 소리없이 내린다더뇨
나희덕, 재로 지어진 옷
흰 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개짓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천양희, 바다 보아라
자식들에게 바치느라
생의 받침도 놓쳐버린
어머니 밤늦도록
편지 한 장 쓰신다
‘바다 보아라’
받아보다가 바라보다가
바닥 없는 바다이신
받침 없는 바다이신
어머니 고개를 숙이고 밤늦도록
편지 한장 보내신다
‘바다 보아라’
정말 바다가 보고 싶다
최문자, 멍들다
샤워를 하다 보니
여기저기 시퍼런 멍자국이 보였다
세상에 간들간들 매달렸던 자리가 퍼랬다
어디엔가 묶였던 자리는 더욱 퍼렇다
도처에 끈뿐이다
끈 하나를 끊고 나면
수없이 가위질하고 나면
식은땀 흘리며 하루가 지나갔다
끈에 파묻힌 밤이 퍼렇게 지나가는 동안
피 묻은 말들이 서서히 뭉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