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추억에서
진주(晉州) 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 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 엄매야 울 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晉州) 남강(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 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문정희, 돌아가는 길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이준관, 길을 가다
길을 가다 문득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다가가 그 곁에 가만히 서 보고 싶다
잎들이 다 지고 하늘이 하나
빈 가지 끝에 걸려 떨고 있는
그런 가을 날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내 어깨와
아기새의 그 작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디든 걸어 보고 싶다
걸어 보고 싶다
천양희, 옷깃을 여미다
비굴하게 굴다
정신차릴 때
옷깃을 여민다
인파에 휩쓸려
하늘을 잊을 때
옷길을 여민다
마음이 헐한 몸에
헛것이 덤빌 때
옷깃을 여민다
옷깃을 여미고도
우리는
별에 갈 수 없다
한혜영, 본색을 들키다
화학비료로 키운 비트는
굵은 소금을 뿌려보면 대번에 안다
붉은 물이 빠지면 가짜다
굵은 소금 한 주먹에게
나도 본색을 들킨 적이 있다
사랑이 가짜라는 사실에
당황, 붉은 물
뚝뚝 흘리며 달아난 적이 있다
자신까지도 깜빡 속이던
색의 정체를 다 알아버린 인생이라면
너무 재미없지 않나
행복한 한때라고
단단히 믿는 그대여 조심하시라
사방이 염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