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아무르
새가 울고
꽃이 몇 번 더 피었다 지고
나의 일생이 기울었다
꽃이 피어나고
새가 몇 번 더 울다 그치고
그녀의 일생도 저물었다
닉네임이 흰구름인 그녀
그녀는 지금 어느 낯선 하늘을
흐르고 있는 건가
아무르, 아무르 강변에
새들이 우는 꿈을 자주 꾼다고
나도 메일을 보냈다
김상미, 자라지 않는 나무
우리는 너무 우울해 먹은 것을 토하고 토하고
우리는 너무 외로워 귀를 막고 노래를 부르고 부르고
그래봤자 우리는 모두 슬픈 뱀에게 물린 존재
상처가 깊을수록 독은 더 빨리 퍼져
우리는 키스를 하면서도 썩어가고
우리는 사랑을 나누면서도 썩어가고
그래봤자 우리가 소유하는 건 날마다 피로 쓰는 일기 한 페이지
나부끼고 나부끼고 나부끼다 주저앉은 바람 한 점
그래도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밖으로
가급적이면 더 치명적인 비극, 희망을 향해 바퀴를 굴리고
그러다 만병통치 알약처럼 서로를 삼키고
사막같이 바싹 마른 가슴에 불치의 기우제를 올리는
우리는 수많은 이름들을 발가벗겨 구름 속에 처박고
어찌할 줄 몰라 밤에게 된통 걸려버린 나무 그림자
밤새도록 춤, 춤만 추는 자라지 않는 나무
허만하, 낙동강 하구에서
바다에 이르러
강은 이름을 잃어버린다
강과 바다 사이에
흐름은 잠시 머뭇거린다
그때 강은 슬프게도 아름다운
연한 초록빛 물이 된다
물결 틈으로
잠시 모습을 비쳤다 사라지는
섭섭함 같은 빛깔
적멸(寂滅)의 아름다움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커다란 긍정 사이에서
서걱이는 갈숲에 떨어지는
가을 햇살처럼
강의 최후는
부드럽고 해맑고 침착하다
두려워 마라, 흐름이여
너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리니
일곱 가지 슬픔의 어머니
죽음을 매개로 한 조용한 전신(轉身)
강은 바다의 일부가 되어
비로소 자기를 완성한다
정윤천, 경첩
너를 열고 싶은 곳에서, 너에게로 닿고 싶을 때
아무도 모르는 저 은밀한 해제의 지점에서
쇠 나비 한 마리가 방금 날개를 일으켰다는 일이다
그의 차가운 두 닢이 바스락거리기라도 하듯이
한번은 펼쳐 주어야만, 나는 너에게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너를 한번 열어, 너에게로 간다는 사실은
어딘지, 너 이전의 지점 같기도 한 보이지 않은 곳에서
숨긴 날개의 쇠나비 한 마리가
비로소 활짝 펼쳐 주었다는 일이다
사랑의 경계에는 한사코 쇠나비 한 마리가
접은 날개의 기다림으로 깃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고진하, 묵언의 날
하루 종일 입을 봉하기로 한 날
마당귀에 엎어져 있는 빈 항아리들을 보았다
쌀을 넣었던 항아리
겨를 담았던 항아리
된장을 익히던 항아리
술을 빚었던 항아리들
하지만 지금은 속엣 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거꾸로 엎어져 있다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시위일까
고행일까
큰 입을 봉한 채
물구나무 선 항아리들
부글부글 거리는 욕망을 비워내고도
배부른 항아리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항아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