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흐린 날
자본도 월급도 못 되었던
내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
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
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승달이 만월을 낳니
차고 기우는 것, 그게
차다가 기우는 건 아닌데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승달이 만월을 낳니
천장에서 비 새는 듯한 흐린 날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초승달이
보이지 않는 만월을 또 낳기도 하겠구나
길상호, 소춘(小春)
가을 한복판에
봄꽃들 피어나는 시기가 있다지요
하늘 팽팽해지도록 찬 기운 불어넣던 바람도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제때 펼치지 못한 계절 어서 꺼내보라고
하느님도 모르는 척 고개 돌려주는
그 시기에 잠깐
진달래도 개나리도 목련도
죽을힘 다해 꽃송이를 내민다지요
그렇게 핀 꽃은
피똥처럼 아프다지요
그래도 마음은 한결 가볍다는데
형도 죽기 전 며칠
얼굴 가득 그 꽃을 피웠지요
빨갛게 피워놓고 하늘로 날아갔지요
잊혀지려다가 다시 또 봄
가을에 봄꽃이 피면
차마 그 향기 맡을 수가 없지요
이수정, 벼루
눈을 가진 돌이 있어
꿈 없는 밤들을 이겨 만든 먹
간절히 문지르면
검고 맑은 거울 되는 돌
그 거울 고요히 들여다보면
돌의 환상이 보인다고 한다
광물이 녹아 흐르는 강
금빛 글자들 거슬러 오르는
검은 강
날이 저물면 불새가 날아와
굵고 싱싱한 글자를 채간다고 한다
임효림, 지금은 고독할 때
아직은 고독을 그만 둘때가 아니다
지금은 더욱 고독해야 할 때
철저히 짓밟혀 본 놈만이 안다
버림받은 자의 슬픔을
가까운 친구들조차 하나 둘 떠나고
찾아오는 놈 하나 없어 빈집같이 적막하다
거리에 나가도 찾아갈 곳 조차 없고
아는 이를 만나도 외면 아니면 건성의 인사만 오고 간다
빛나던 사상
아름답다던 정신
그 많은 박수갈채는 다 어디로 갔나
지금은 더욱 고독해야 할 때
고독이 사무치면 되레 빛이 되는 법
아직은 고독을 그만 둘 때가 아니다
조태일, 보리밥
건방지고 대창처럼 꼿꼿하던
푸른 수염도 말끔히 잘리우고
어리석게도 꺼멓게 익어버린 보리밥아
무엇이 그렇게도 언짢고 아니꼬와서
나를 닮은 얼굴을 하고
끼리끼리 붙어서
불만의 살갗을 그렇게도 예쁘게 비비냐
무릎을 꿇고 허리도 꺾어
하염없이 너희들을 보고 있으면
너는 너무도 엄숙해서
농담은 코끝에서 간지러움으로 피고
가슴 속엔 더운 북풍이 인다
너희들은 쾅쾅 칠 땅은 없고
바람 끝에나 매달리면 어울릴 땀을
다 뒤집어쓰고 나더러는
고추장이나 돼라 하고 나더러는
아무 데서나 펄럭일 깃발이나 돼라 하고
탱자나무 울타리 위에
갈기갈기 찢겨 널리던 바람처럼
활발하게 살아라 하느냐
멍청한 보리밥아
똑똑한 보리밥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