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 길
여섯 살 눈 내린 아침
개울가에서 죽은 채 발견된 늙은 개 한 마리
얼음장 앞에 공손히 귀를 베고 누워
지상에 내리는 마지막 소리를 견뎠을
저문 눈빛의 멀고 고요한 허공
사나흘 꿈쩍도 않고
물 한 모금 축이지 않고 혼자 앓다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개울가로 걸어간
개 발자국의 선명한 궤적이
지금껏 내 기억의 눈밭에 길을 새긴다
최승자, 홀로 가는 낙타 하나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길을 묻다 지쳐서
길 위에서 잠든다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죽음을 죽음으로 일깨우면서
그리하여 별빛 아래
홀로 가는 낙타 하나
별 아래 잠도 없이
홀로 가는 낙타 하나
황영선, 개운포에서 길을 잃다
달 밝은 밤이면 개운포 갈대밭에서
들려온다는 그 노래
그대 마음 이미 내 것이 아니니
어찌할까 어찌할까
웃어라 웃어라
발밑에 와 부서지는 너털웃음
배를 띄워야 하건만
마음에 이는 풍랑은 잡을 수가 없네
달맞이꽃 피고 지는 세죽마을 앞바다
우뚝우뚝 솟은 굴뚝이 옛 기억을 희미하게 하여도
낡은 배 몇 척 거느리고
갈매기를 기다리는 바위 섬
마음은 천 길 바다 속
슬픔 사랑이어라
달빛 아래 흔들리던 그 춤사위
밤안개가 스멀스멀 처용 바위 전설을 감싸는
사라진 포구에서
그대도 나처럼 길을 잃고 서성이는가
박이도, 소시장에서
가난을 풀어가는 길은
너를 소시장에 내놓는 일이다
한숨으로 몇 밤을 지새고
작은아들쯤 되는 너를 앞세우고
마을을 나선다
너는 큰자식의 학비로 팔려나간다
왁자지껄 막걸리 사발이 뒹군다
소시장 말뚝만 서 있는 빈 터
찬 달빛이 무섭도록 시리다
헛기침 같은 울음으로
새 주인에 끌려가던 너의 모습
밤사이 이슬만 내렸다
우리 집 헛간은 적막에 싸이고
아들에게 쓰는 편지글에
손이 떨린다
소시장에서 울어버린 뜨거움
아들아, 너는 귀담아들어라
오늘 우리 집안의 아픔을
강기원, 편지
나는 네게 글을 보내지 않았다
바다는 가장 난폭한 순간에 정지해
바위를 세우고
나는 외눈처럼 외로운 시간에
내 가장 깊숙한 뼈를 뽑아든다
검은 피 찍어 쓰는 뼈의 붓 한 자루
나의 필법은
일필휘지의 유려함이 아니라 눌변의 온 박음질
처음 재봉틀 앞에 앉았을 때
자꾸 우는 천 위에서 튕겨 나가던 바늘
그런 보법으로
내 살가죽에 한 땀 한 땀 새기는 쐐기문자
먼데 바다가 운다, 주름을 잡으며 운다
살가죽이 운다, 우그러진다
서툰 바늘 아래서 소리도 없이 울었다 천처럼
내출혈의 밤들
파지를 만들 듯 수 없는 나를 구겼다 버리며
가까스로 한 장의 편지를 완성한 날
네게 보낸 건 글이 아니었다
파피루스보다 오래되고 얇아진
이미 설화가 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