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학, 데미안
시간은 알을 깨고 나온다
가스레인지 모서리에 계란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을 깨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자신이 낳은 알을 쪼고 있었다
탁탁(琢琢)
계란이 가장 맛있는 프라이로 되는 시간은 2분이며
세상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이분법이지
헷세가 탁자 위에 계란을 돌리며 말했다
돌던 계란을 잡았다가 놓았을 때
그대로 탁, 멈추면 삶은 알
멈추는 듯 다시 돌기 시작하면 날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가 슬픈 것은 관성 때문이었어
헤, 헷, 헷세가 말을 더듬었던 것도 같은데
관성이 삶에 작용한다는 것은
그 삶이 삶겨지지 않은 까닭이므로
젊은 시인이 슬픈 것은
관성 때문이 아니라
네가 가진 계란은 죽었니 살았니 묻는 이분법
어느 날부턴가 누군가 묻지 않아도
그 물음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유경, 꽃사과나무
아파트 뜰에 옮겨 심은 꽃사과나무 한 그루
지난봄에도 새 꽃가지들 치켜들고
서늘한 바람결 골라내
흥분한 꽃술 추스르며 여름 하나 보냈건만
가을은 그에게만 늘 무정한 풍경으로 왔다
허위의 만국기 펄럭이던 세상 겪었으니까
꽃에게 배신당한 벌과 나비
전자파의 바다로 침몰해 갔으니까
기껏 콩알만 한 사과들로 치장했으니까
홀로 된 자 잠 설치는 동짓달 긴 새벽
하지만 꿈꾸는 꽃사과나무
최승자,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무들 사이에 풀이 있듯
숲 사이에 오솔길이 있듯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
죽음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거꾸로도 참이었다는 것이다
원론과 원론 사이에서
야구방망이질 핑퐁질을 해대면서
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김윤, 마량진
갈매기 떼가
썰물을 끌고 간다
가다가 저만큼 부리의 힘을 탁 놓아버린다
뻘 건너 수평선이 팽팽해진다
발바닥이 드러난 어선들이
스크류를 이빨처럼 간다
뻘밭이 수천 개의 흡반을 들이댄다
박하지 새끼가
구멍마다 집게발 하나씩을 내밀고
노을을 섬뜩 베어 문다
뻘이 번득이며 붉게 물든다
아직도 흙탕인 바다가 지는 해를 한 번 더 울컥 떠올린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듯이
뻘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작은 횟집 몇이 불을 켜들고
흡반 속으로 빨려든다
최재영, 항아리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
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
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
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
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
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
나는 햇살을 움켜쥐고
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
아주 오랫동안
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
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
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
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
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
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
내게 저장된 세월을
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