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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규, 그대라는 말
달비골 자락 숭숭한 나뭇가지 사이로
다 식은 국물 같은 그대가 나타나
늦은 오후의 겨울 쭉정이를 밟고 지나간다
목덜미 감싸며 들리는 소피국집 송풍기 소리가 달다
나는 지금 그대를 안고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
그대를 안고 떠난다면
외로움에 파묻혀 숨조차 쉬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나는 겨우 그대라는 말만 안고 떠나려 한다
언 아스팔트 위에서 도르르 구르는 그대라는 말
바스락거리며 띄엄띄엄 따라오기도 하고
바람의 속도만큼 저만치 먼저 가 기다리기도 하고
파르르 떠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 말의 꼬리만 따라와
오랜 친구처럼 서성대는 그대라는 말
나 오늘 둥글게 번지는 심장의 파문 때문에 외롭지 않다
김왕노, 딱 한 걸음
삶과 죽음 사이도 딱 한 걸음이다
피었던 꽃이
시드는 사이도 단 한 걸음이다
사람이 사랑으로 가는 것도 단 한 걸음이다
하나 한 걸음에 천년이 가기도 한다
한 걸음에 평생이 후딱 가버리기도 한다
빗속에서 밀가루 떡 냄새가 난다
창을 활짝 열어둔다
어린 시절 머리맡에 놓여진
밀가루 떡 한 조각
동구의 밭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점심 무렵 돌아와
막내를 위해 만들어 주던 밀가루 떡
누군가의 머리맡에
그런 시 한 편 슬몃 밀어 놓은 날 있을까
골목의 빗속에서
아무 맛도 없이 부풀어 가는
천양희, 활
활이 구부러져 있다
어머니 등이
구부러졌다
구부러져야 멀리
날아가는 활
구부러진 활도
부러질 때가 있으니
마지막
어머니 등이 그러하였다
정호승, 허물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린 매미를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허물이 없으면 매미의 노래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허물의 힘에 놀라
슬며시 손을 떼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다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