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란, 그림자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언어에도 그림자가 있을까
그림자를 가진 시가 있을까
소리와 향과 감촉과 무게가 있다면
분명 그림자가 있을 게다
햇살과 바람에 자라는 나무들
추억처럼 잿빛의 분신을 드리운
언어의 그림자가 나의 몸을 감싼다
그림자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땅으로부터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자유롭게 한다
바람의 흔적과 움직임을 살아 있게 한다
두터운 커튼도 그림자를 가리지 못한다
부풀어 오른 나뭇잎들이
굳게 닫힌 창문을 열지 않고도 들어와
잠든 공간을 흔들며 깨어 있게 한다
시의 그림자가
내 생의 한순간을
흔들어
깨어 있게 한다
황동규, 어스름
휘돌아가던 저 강물 채 돌기 전
걸음 멈추고 되돌아보지 않듯
하늘에 막 떠오른 기러기 떼
어정대던 곳 되돌아보지 않고 그냥 날아가듯
어스름
강가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흔들리기도 않기도 하는 배 한 척
한참 있다가 봐도 그냥 묶여 있다
그 옆에 가슴 한쪽이 무너진 갈대밭도
어스름
가는 것은 그냥 가고
있는 것은 그냥 있다
이 가고, 있는, 시간 틈새에
한 가닥 유리딱새 소리
모짜르트 유리(琉璃) 하모니카 몇 소절
되담을 수 없는 빛 한 잔(盞)
박명보, 버려진 우산의 효용성
받아치는 일에만 골몰했었다
바깥을 들이는 일은
조금씩 무너져가는 일이라 믿었으므로
희박한 공기 속에서만
내 사원의 기둥들은 뼈대처럼 빛났다
침묵 속에서 견고해지는 은빛 창살들
꽃의 기원은 중생대 백악기라는데
나무도 잎도 아닌
그 작은 꽃잎이 머금은 수분으로
푸른 초원이, 숲이 무성해졌다는데
오랜 가뭄 끝, 가을비 내린다
촘촘한 방충망 너머 화단이, 꽃들이
젖고 있다
몸을 열고 있다
그 옆 아스팔트 위
제 속을 뒤집어 꽃의 자세로 누워있는 보라색 우산 하나
저도 이제 꽃인 양
떨어진 도라지꽃을 흉내내보는 것인지
부서진 제 흉강 속으로
그렁그렁
빗물 들이고 있다
홍영철, 그 나무
반성도 없이 하루가 갔습니다
세상도 뒤바뀐 것이 없습니다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것들이 쓰러져갔습니다
그랬거나 어쨌거나
이랬거나 저랬거나
그래도 아무튼
오늘 하루만큼 세월은 흘렀습니다
어둠이 잠들어 있는
과천 현대미술관 앞마당에 가면
나무들이 잔디밭 군데군데 박혀 있습니다
나무들은 참 좋겠습니다
찾아 떠돌지 않아도 되니까요
임연태, 일주문
기둥만 서 있는 문
없음이 곧 경계라서
안과 밖이 따로 보이지 않는 문
수없이 많은 문을 열고 닫으며 살지만
내게 있어도 오히려
내가 열지 못하는 문
내 마음 속 일주문 밖에서
나는 오늘도 하염없는
떠돌이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