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bgmstore.net/view/vHRoW
김명철, 틈
몸과 마음을 단단히 여며도
당신은 아무도 모르게 습격당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전면전이어서
낮과 밤 뼈와 살을 구분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은행알과
육삼빌딩과 깨진 돌과 핸들 꺾인 세발자전거와
지표를 뚫고 올라오는 지하철 탄 사내가 여자가 당신을 습격해온다
빈틈없는 생활
방심하지 않는다 해도
어느 틈엔가 당신에게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틈은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당신은
저항하다 기어이 붙들리고 만다
그 틈으로 당신의 절반이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당신은 마지막 일전을 치를 수도 투항할 수도 없다
틈은 처음에 하무도 모르게 그러나 나중에는
당신을 제 마음대로 관리한다
이동훈, 연락 두절
여남은 날, 눈이 줄곧 내려
쌓인 눈이 서까래 밑까지 이르면
다락 창문을 통해
굴뚝만 남은 그대 집을 보게 되겠지
피어오를 어떤 희망도 없이
눈 속에 파묻힌 그대
그대는 끝내 신호를 보내오지 않고
생각다 못하여 널빤지를 내어 밀고
전신줄을 자일 삼아
눈구멍길을 지치고 가려 하네
막막한 그대 집으로 가려 하네
창문께의 눈을 헤치면
그대, 나를 또 한 번 부끄러워하려나
구호품 붉은 딱지가 선명한
라면상자를 들키고 벌게지던 그때
내 귓불이 더 벌게졌다는 사실을
나도 들키고 싶었네
내게든 네게든 미안한 옛날을
층층 덮듯이 눈이 쌓이면
그대, 닫힌 문을 다시 두드리고 싶네
얼어붙은 눈이 다 녹을 때까지
라면 한 상자를 다 축낼 때까지
그대 곁에서
연락 두절로 지내고 싶네
신달자, 적막이 적막에게
내 안에서 늘 부시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
어쩌다가는 쿵쿵 쾅쾅 하는 거센 소리도 들리지
오늘은 그 소리 내 밖으로 터져 나가서
옆구리가 욱신거리기도 했어
적막을 베고 적막을 쓸고 적막을 깨부수어
허공 계단을 만들고 있는지
허공의 부스러기들이 우박으로 새벽잠을
두들긴 게야 계단은 그때 한 단계 만들어지나 봐
오르고 싶었어
몇만 평 평야보다 넓어지는 이 허공을 조각하여
오르고 또 오르면 거기 도무지 무엇이 있을까
거기 또 다른 허공이 적막을 두르고 날 오라하면
오늘은 그렇다네
허공계단을 밟고 경건히 오르고 올라서
계단 하나하나를 접어
건반처럼 뼈가 울리는 소리가 나도록
오르고 싶어, 지상의 들붙는 먼지들은 내리고
나도 한 번은 깨끗하고 상긋하게
그렇게 사뿐하게 오르고 싶어
오르고 싶을수록 내 안에 부시럭거리는 소리 높아지고
누구하나 손잡아 주는 이 없이 나는 서서히 오르는데
긴 구름치마를 끌며 아카시아꽃 화관을 쓰고 나 오르지
거기 나비무늬의 비단 적막이 날 반기네
여기서는 한 번은 아프지 않게 웃어보라 하네
내려가는 계단은 지워도 좋겠어
실은
여기가 바로 거기라네
김왕노, 궤나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가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
그리워질 때면 그립다고 부는 궤나
그리움보다 더 깊고 길게 부는 궤나
들판의 노을을 붉게 흩어 놓는 궤나 소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짐승들을 울게 하는 소리
오늘은 이 거리를 가는데 종일 정강이뼈가 아파
전생에 두고 온 누가
전생에 두고 온 내 정강이뼈를 불고 있나 보다
그립다 그립다고 종일 불고 있나 보다
김성규, 불길한 새
눈이 내리고 나는 부두에 서 있었다
육지 쪽으로 불어온 바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넘어지고 있었다
바닷가 파도 위를 날아온 검은 눈송이 하나
춤을 추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의 건물들은 몸을 웅크리고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마구 흔들었다
눈송이는 점점 커지고, 검은 새
젖은 나뭇잎처럼 쳐진 날개를 흔들며
바다를 건너오고 있었다
하늘 한 귀퉁이가 무너지고 있었다
해송 몇그루가
무너지는 하늘 쪽으로 팔다리를 허우적였다
그때마다 놀란 새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