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은하영웅전설』─
이 작품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촌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소위 7080식 "후까시"가 잔뜩 들어간 작명 센스가 아니냐고 비웃는 사람도 더러는 있겠지만, 작품 기획 단계에서 오고 갔던 가제로는 『은하 삼국지』, 『은하의 체스게임』등이 있었다. 그런 제목들에 비하면 『은하영웅전설』이라는 제목은 훨씬 군더더기 없이 간단하고 멋있지 않은가! 그리고 필자가 장담컨대, 이 작품의 정주행을 끝마친 이후 독자 여러분은 『은하영웅전설』이라는 제목이 주는 웅장함과 중후함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1982년, 원작자 다나카 요시키 선생이 대학생 시절 용돈을 벌기 위해 썼던, 이후에 애니메이션화된 이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은 우리 은하를 양분하는 두 거대국가, 민주정 체제의 자유행성동맹과 전제정 체제의 은하제국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간략한 소개만 읽는다면 단순히 우주전쟁을 중심으로 한 스타워즈 아류 이야기 같지만, 본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선을 그을 수 있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은하영웅전설』은 「정치」를 다룬다.
서브컬쳐계에서 이토록 적나라하게 정치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 흔하지 않고, 또한 명작은 널리 퍼뜨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같이 즐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이 소개글을 쓰는 바이다. 그러나 필자가 개인적으로 소개하고 싶은 다른 작품 또한 많음에도 불구하고 굳이『은하영웅전설』을 선택한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이 그리 밝지 못 한 탓이다.
다소 혼란스러운 정국 하에서,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는 무엇인지, 정치라는 것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다들 자기 생각이 확고한 채로 정치에 참여해야 하지, 단순히 남의 말만 듣고 이리저리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우리가 좀 더 생각을 많이 하고 좀 더 똑똑해져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관련 전공 서적과 유명 사상가들의 저서를 구해 공부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지만, 그 이전에 소설과 애니메이션을 통해 정치에 대해 흥미를 돋우는 것으로 시작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딱딱하지 않은 정치 이야기
정치라는 키워드는 특별히 명석하지 않는한 어린 시절에 소화해내기 힘든 주제이다. 사실 성인이 되어서도 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대부분 픽션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조차 다가가기 힘든 것이 정치인듯 하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정치적 암투가 중심인 작품들은 그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나 좋아하지 절대다수의 대중들에게 폭넓게 사랑받는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정쟁이 아닌 진짜 행정으로서의 정치를 다룬 영지물이라 하더라도, 소싯적에 삼국지 게임이나 몇 번 해보고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경제학의 기초 개념 등이 배경지식의 전부인 작가들이 써 낸 불쏘시개들만이 넘쳐난다. 이데올로기니 뭐니하며 확성기 들고 웅변하는 것도 옛날이면 모를까, 21세기에는 고리타분한 소리다.
『은하영웅전설』은 약간 다른 전개를 보여준다. 기본적으로는 정치체제들에 대한 여러 고민을 내보이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전쟁으로 풀어나간다. 영웅들의 피튀기는 전투와 신산귀모의 책략, 그리고 장렬한 죽음이 꽃피는 삼국지연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잘 쓴 군웅물은 남심男心을 휘어잡기에 충분한 물건이다. 거기다가 우주공간에서의 초대형 함대전이 항상 일어나는『은하영웅전설』은 애초부터 소년 청년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은하영웅전설』이 흔해빠진 군웅물들과 차별되는 점은, 아까 설명했듯이 이 작품이 정치라는 화두를 독자들에게 던지기 때문이다. 만약 춘추전국시대나 센고쿠 시대처럼 세속적인 이득을 위해 다수의 군벌들이 전쟁을 벌이는 시기를 배경으로 삼았더라면,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도덕이나 이념 따위는 내다버리고, 특별한 한 두 명만이 덕을 숭상하는 뻔하디 뻔한 3류 전개가 펼쳐질 것이다.
『은하영웅전설』에서는 이와 다르게, 행성 하나만을 가지고 있는 중립국, 페잔 자치령을 제외하면 전 인류는 단 두 개의 대국으로 나뉘어져있다. 「은하제국」과 「자유행성동맹」으로,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굉장히 심심할 정도로 간단하게 양분되어있는데, 의외로 이 설정은 독자들이 정치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전제정과 민주정이 자신의 입장을 절대 양보하지 못 하고 맞부딪히는, 지극히 단순하고 알기 쉬운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위대한 지도자
일본의 서브컬쳐는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민주주의를 숭고한 이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를 비틀어 버리는 것이 클리셰로 정착되었는지, 아니면 일본의 정치현황이 워낙 시궁창스러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퍼스트 건담의 지구연방이 그리 긍정적으로만 그려지지는 않는 것을 보면 일본 서브컬쳐계의 이런 성향은 결코 최근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비록 2010년대에 들어서 일본 사회의 극우화가 가속화 되고는 있다고 하지만, 민주주의를 타도하고 독재를 찬미하는 주인공이 나올 정도로 노골적인 작품은 없는 것을 보면(혹은, 있다고 해도 유명세를 얻지 못 한 걸 보면) 아무리 현대의 일본이라 하더라도 서브컬쳐계의 주된 소비자층이 아직까지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헌데 『은하영웅전설』은 독자들에게 다르게 생각할 여지를 만들어준다. 우리는 날 때부터 민주국가에서 교육받고 자랐으니 이유를 명쾌하게 대지는 못 하더라도 어렴풋이나마 전제정보다는 민주주의가 낫다고 믿고 있다. 특히 한국은 시민들이 직접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역사가 있으니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 같을 것이다. 그런데 조건만 갖춰지면, 전제군주제가 민주주의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물음을 던지기 위해 작가는 한 명의 인물을 우리에게 소개하니, 바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다.
"나는 우주를 훔치려는 게 아니야. 빼앗으려는 거다."
『은하영웅전설』의 주인공 라인하르트는 은하제국의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뛰어난 실력으로 나이 약관에 이미 원수 계급까지 올라간 천재 중의 천재이다. 아무리 제국과 동맹이 항시 전시상황이라 하나, 갓 스무살이 된 청년이 원수 계급을 달았다는 것은 픽션임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도 파격적이며, 이는 라인하르트가 군사적 능력에 있어서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재능을 타고났음을 역설한다.
단순히 전략전술에만 능한 장군이 아니라, 행정, 사법, 모략, 무예, 예술 등등 못 하는 것이 없는 먼치킨 주인공이며 성품 또한 매사에 공명정대하고 흠잡을 곳이 거의 없다. 거기다가 웬만한 미남들은 그저 그런 얼굴로 보이게 만들 절정의 꽃미남이니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다. 게임으로 치자면 모든 스탯이 한계치를 찍은 것이다. 이런 사람이 심지어 황제의 위를 찬탈하겠다는 거대한 야망도 품고 있으니, 우주를 품은 대제국의 통치자가 되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적격이지 않은가.
작중의 은하제국은 이미 국가로써의 수명이 다하여 멸망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쇠망한 국가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인하르트라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몇 번 나오지도 않을 걸출한 인재가,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다시 부강한 제국을 만들겠다고 하니 그 어느 누가 반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자유행성동맹은 사정이 약간 다르다.
민주주의는 과연 최선의 정치체제인가
"Oh, hail! Liberty bell! True freedom for all men!"
-자유행성동맹 국가 中
플라톤이 일찍이 지적했듯이, 민주정은 얼마든지 중우정치로 탈선할 가능성을 떠안고 있다. 『은하영웅전설』속의 자유행성동맹은 내각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거대국가인데, 작중 시점에서 이미 정치인들은 각종 비리부정부패에 찌들고, 인기를 얻어 선거에서 이기는 것만 생각해 정상적인 사고 기능이 마비되는 등, 플라톤이 염려한 바로 그 상황이 펼쳐져 있다. 단순히 흑막 포지션에 있는 몇몇 인물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정 그 자체가 생명력을 잃고 죽어버린 국가인 것이다.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역기능과 부작용이 극대화된 정부다. 아무리 투표를 열심히 해봤자 아무 것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나마 소수의 뜻있는 사람들이 시위를 하며 목소리를 내보지만 정치인들은 폭력을 써서 집회를 강제해산시킨다. 국가 이념이 이념이다보니 제국과의 휴전은 꿈도 못 꿀 일이라 군비 지출과 인명 피해는 여전히 막대하다. 사회기반시설은 낙후일로를 걷는다. 민중의 구심점이 되어줄 혁명가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맹 따위는 그냥 멸망해버리고 은하제국의 공명정대한 꽃미남 먼치킨 지도자에게 통치 받는 것이 절대 다수의 국민들에게 더 낫지 않을까?
알기 쉬운 비유를 해보자면, 연산군이 대통령인 나라보다는 세종이 왕인 나라가, 시민 개개인에게나 국가 전체에게나 비교해볼 필요도 없이 훨씬 긍정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그 어떤 긍정적인 형태의 발전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자유행성동맹이, 단순히 정치체제가 민주정이기 때문에 무조건 외세로부터 지켜내야 하고 존속시켜야 하는 것일까? 국가가 국민 개개인에게 제대로 해 주는 것도 없이 애국심만 들먹이며 제국과의 전쟁터로 젊은이들을 내보내는데? 정치인들은 국민을 그저 표 뱉어내는 기계로만 생각하는데도? 나라가 나라 같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당장 정부에게 소모품 취급 받고, 혁명도 개혁도 불가능한 이 나라를?
차라리 저 위대한 지도자 밑에 머리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 백배천배 행복하지 않을까. 라인하르트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철혈의 독재자도 아니고, 단순히 입헌군주제가 아닐뿐이지 법률도 세금도 공정하고, 자유도 보장되어있는 유토피아를 건국해 잘 다스리겠다는데 말이다. 라인하르트가 추구하는 것은 황제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만민이 평등한 제국이니, 귀족과 평민의 차별도 없이 능력있고 성실한 사람이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전통적인 전제정치와는 비교하기조차 미안해지는 이상적인 사회구조다.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쓰던 도구가 망가지면 다른 도구로 교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단순히 민주국가라는 이유만으로 부패한 동맹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도구가 아닌 목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닐런지?
여기까지 읽고나면,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는 독자분들이 분명 몇몇 있을터. 물론 가상의 설정이긴 하지만, 최악의 민주정과 최고의 전제정,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무엇을 고를지 선뜻 선택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최선이고 독재자는 몰아내야 한다고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아왔는데, 당장 이런 극단적인 케이스로 비교를 하니 혼란이 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거기다 민주국가가 저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는 것도 머나먼 별나라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에게 충분히 일어날법한 이야기이기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왜 민주주의인가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명군일수록, 그는 민주공화정 최대의 적이야."
여기서 작가는 양 웬리라는 또 하나의 주인공을 내세운다.
원래 역사학자를 지망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학비가 일절 면제인 사관학교에 전쟁사를 공부하러 갔다는, 인생의 시작 단계부터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다. 간단한 데스크 업무도 제대로 못 보는 어리버리하고 무능한 군인 취급을 받지만, 양 웬리의 진가는 바로 전략전술. 위에서 언급한 먼치킨 라인하르트와 비교해도 절대로 밀리지 않는, 어떻게 보면 더 뛰어나다고까지 할 수도 있는 군사적 재능의 소유자다. 공격이면 공격, 방어면 방어, 퇴각이면 퇴각, 기만이면 기만,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군사적 운용에 능통한 명장 중의 명장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유행성동맹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이유로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신뢰를 품고 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라인하트르와 대립해, 사력을 다해 은하제국에 맞서게 된다. 양 웬리는 라인하르트가 열겠다는 유토피아 제국을 거부하는 것이다.
위에서 미리 밝혔듯이 일본의 서브컬쳐는 대개 민주주의를 그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위대한" 사명을 지닌 캐릭터가 전무한데, 양 웬리는 이런 점에서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끝간 데를 모를 정도로 부패하긴 했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피를 흘려 수호할 가치가 있는 체제이며, 따라서 은하제국이 어떤 나라가 됐건 일단 민주정은 지켜내고 봐야한다는 사상을 가진 것인데, 이러한 양 웬리의 태도는 아까 설명한 딜레마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언뜻 보면 굉장히 비이성적인 생각으로 점철된 사람이다. 다른 시점에서는, 그깟 이념 때문에, 결과적으로 어쨌든 전 인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라인하르트에게 쓸데없이 저항하는 몽상가일 수도 있으며, 이는 작중의 서술에서조차(!) 분명히 나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둬야 하는 것은, 작가는 최악의 민주정과 최선의 전제정 사이에서 생긴 이 딜레마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답을 전달하기 위해 양 웬리의 입을 빌린다는 것이다. 양 웬리에게는, 인류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위대한 군주 치하의 태평성대를 거절하면서까지 민주주의를 지키려 하는, 간단하지만 명확한 이유가 있다.
물론 이 글은 어디까지나 소개글일뿐 리뷰글이 아니기에, 그 상세한 답이 무엇인지는 독자 여러분이 직접 작품을 접해 알아보길 바란다. 또는 이 『은하영웅전설』이라는 알기 쉬운 골격을 지닌 정치우화를 교보재로 삼아 자기 나름대로의 답을 도출해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마치며
『은하영웅전설』은 10대와 20대의 정치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키에 꽤나 효과적인 작품이며, 더 나아가 젊은 세대의 바람직한 정치 참여를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점이 특기할만 하다. 『은하영웅전설』을 접한 뒤 정치란 무엇인지,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면, 당신은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작중의 한 마디를 남기고자 한다."『정치 따윈 나하고는 관계 없어』라는 한 마디는 그 말을 한 사람에 대한 권리 박탈 선언이다.
정치는 자신을 경멸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수하는 법이다."
이 글은 애니메이션 게시판 콘테스트 <이 작품을 소개합니다>의 참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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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회 <이작소> 투표하러 가기
투표기간 :: 8월 11일 ㅡ 8월 17일 오후 8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