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철, 부리와 뿌리
바람이 가을을 끌어와 새가 날면
안으로 울리던 나무의 소리는 밖을 향한다
나무의 날개가 돋아날 자리에 푸른 밤이 온다
새의 입김과 나무의 입김이 서로 섞일 때
무거운 구름이 비를 뿌리고
푸른 밤의 눈빛으로 나무는 날개를 단다
새가 나무의 날개를 스칠 때
새의 뿌리가 내릴 자리에서 휘파람 소리가 난다
나무가 바람을 타고 싶듯이 새는 뿌리를 타고 싶다
밤을 새워 새는 나무의 날개에 뿌리를 내리며
하늘로 깊이 떨어진다
이선영, 눈
눈이여, 너는
땅에 닿지 말아라
너는 하늘에서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유리창, 공기의 하얗게 벌어지는 열매여서
땅에 내린 너는 깨어진 조각이고 으깨어진 열매이다
눈송이여, 잠깐만 나를 가두어다오
땅 위에서 나의 종적(踪迹)을 찾을 수 없게
눈이여, 너는
땅에 살지 말아라
공중으로 잠깐씩 들어올려지고 싶은 육체들을 거두어 들이는
날아다니는 밀실(密室)이 되어라
김희업, 에스컬레이터의 기법
30도의 기울기란
마음이 먼저 쏟아지지 않는 경사
알 수 없는 자력이 몸을 곧추세운다
그냥 밟고만 있어도
높이가 커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굳이 거슬러 내려가지 않고
계단의 물결에 발을 맡길 것이다
거슬러 오르는 멋진 오류는 연어의 일
한 계단씩 베어 먹은 사람들의 높은 입
그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 날마다 입을 벌린다
외마디 비명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현기증
어떤 뒷모습이라 할지라도 바라보면 쓸쓸하고
꼭 그만큼만 보여주는 생의 짧은 치마
넘치지 않는 저울질로 평등하게 내려놓고
빈 계단만 층층이 접히는 지평선
맞물린 관계 속에
서로 먹고 먹히는 다정한 세계
기울어진 생계를 떠안고
마음이 쓰러지지 않게
흙이 묻지 않는 보법으로 반복되는 생성 소멸
오늘밤
달은 발자국 남기지 않고 가던 길을 갈 것이다
김수복, 달을 따라 걷다
몸이 더욱 가라앉은 저녁
약을 먹고
양재천으로 나왔다
피가 통하지 않는 산의 발등을 넘어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예술공원을 한 바퀴 돌고
실핏줄 흐르는 천변을 걷는다
몸속의 핏줄도 저렇게
기쁘게 흘러갈 수 있다면
바람에 걸려 자꾸 넘어지는 저녁
달을 따라 걷다
내 몸의 피가 소리를 낼 때까지
달의 개울을 걸어간다
황영선, 미시령
마음 쓸쓸해지면
아득한 구름의 처소에
하늘마타리꽃 같은 집 한 채 짓고 살까
버리고 떠나는 것 어려우면
미시령 바람결에 한 닷새 몸을 맡기리
변덕스런 날씨처럼
사랑도 얼었다 녹았다 하는 사이
덕장의 황태처럼 꾸들꾸들 맛이 들겠지
미시령 바람에 마음을 풀어놓고서
서릿발 내린 들녘의 푸성귀처럼
언 입술 들썩이며
마음의 거처를 묻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