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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자, 고등어
마트 한켠에서 잡아올린 고등어 한 마리
굽는다
물결치는 파도를 잠재운다
노릇노릇해지는 바다
한때의 열망도 노릇노릇해진다
부석부석하게 부은 희망도 바싹하게 굽는다
사람들의 발길이 흽쓸려다니던 거리도 굽는다
모든 물결의 끝에는 뭍으로 향하는 그리움만
살지고
그리움의 끝없는 행로에는 지독한 열병이 번져간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숨 막혀 허덕이던 순간에
자신을 배반한 물결을 버리고
고등어는 점점이 해탈식을 치른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밀쳐내는 파도를 타고
파도쳐 그 바다에게로 되돌아간다
헤엄치며
지느러미 물결에 철썩이며 나아가는
한 점 자유로 튄다
김혜수, 날궂이
아직도 노모는 나무라실 때
대체 뭐가 되려고 그 모양이니 그런다
아직 될 것이 남아 있다니 꿈같고 기뻐서
나 아직 할 것이 남아 있다니
눈물겹고 기뻐서
내리는 비를 피하고 있는 처마 밑
누군가 날씨가 어째 호되게 꾸중 들은 날 같냐
하니까 누군가
엄마한테 흠씬 매 맞고 싶은 날이야 그런다
자신보다 더 젊은 엄마 사진을 꺼내며
꾸지람 속으로
임선기, 언어의 온도
저녁의 운동장에서
낙엽이 깔린 긴 숲길을 보았다
저공의 그 숲에 놀던 어린 햇빛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고
쌀알 같은 새 한 마리 조용히 지나간다
이렇게 세상의 화면은 어두워지는구나
나는 붉은 얼굴로
내 발에서 자라는 뿌리 없는 우울을 보며
가난의 개념 같은 세월과 그 끝에 오래된 하늘을
지났다
운동장에 첫눈이 왔다
겨울의 수위실 옆 키 큰 나무야
그 송이들을 저지하지 마라
여러 날 쉽지 않은 추위가 만든 송이들
마냥 차가운 날에
나도 수많은 어휘가 되고 싶다
저기 키 작은 아이들이
두꺼운 옷을 입고
나무를 두드리네
눈이 쏟아지네
최문자, 하루
하루 잘 살기란 힘들지요
하루는 하루살이의 전 생애지요
하루살이에게 시한부로 걸린 하루는 사실 하루가 아니지요
사랑하고 꿈꾸고 아이 낳고 투병까지 하는 사람들의 생애지요
삶의 시간은 배고팠지만
하루만 살고도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삶을 구걸하지 않는 하루살이
바둥거리지 않고 내리꽂히는 가파른 죽음을 보셨는지요
사람들에게는 없는 하루지요
최영철, 노을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